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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큰 인기몰이를 한 드라마
형사는 흩어져있는 잔해들을 보면서 몇 명의 범죄자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는지 등을 상상하여 범죄자의 성향, 의도 등을
분석하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여러 작품에서 접할 수 있는데, 사건현장에 내재된 의미가 매우 풍부함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과정을 상상적 계열화라 한다. 형사가 범죄현장의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죄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과정은 특정 공간의 의미를 확장하고 재규정함으로써, 불규칙적으로 널려있는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가상의 시나리오들을 뒷받침해줄 결정적 단서들이 나타나면 상상 시나리오는 사건의 본질에 점점 접근할 수 있다. 이 결정적 단서들은 특이점(singular point)의 역할을 한다.
사건의 특이점은 우리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이점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끔 하는 중요 변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대기는 언제나 요동치고 있어 다양한 변수들이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곳도
있다. 일반적인 대기가 허리케인과 같은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 요인이 필요한데 이를 특이점이라 부를 수 있다.
특이점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이점으로 우리가 계열화한 사건들은 유지될 수도, 무너질 수도 있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는 이름이 똑같은 두 학생이 이러 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나이가 든 뒤에 회상하는 영화죠. 남자애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 뒤에 여자애의 얼굴을 그려놨습니다. 그 대목이 맨 마지막에 나오죠. 그 얼굴을 본 순간 그 수십 년 동안 그려왔던 계열들이 단 한 번에 무너지는 거죠." -강의 중에서
장소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장소를 축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땅 위에 어떤
새로운 장소를 창조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데, 이것은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장소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할 때에도(지금은 전쟁을 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어떤 장소에서
부딪치느냐가 대단히 중요했죠. 어떨 때는 거기에서 승패가 갈릴 때도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햇빛을 반사시켜서 적을 한 번에 몰살시키는 게
나오죠. 방향을 잘 잡은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 - 강의 중에서
장소를 조형하는 것은 '질료
형상설'과 통한다. 플라톤은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전 지구를 디자인하며 살아가는 시대에 놓여있다. 렘 쿨하스,
베르나르 추미 등 유명 건축가들의 많은 시도는 근본적으로는 언급했던 '장소의 창조'에 얽혀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정우(철학자, 경희사이버대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한 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교수, 녹색대학 교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들뢰즈 <리좀 총서>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가로지르며, 철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등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해 왔다.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