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물결 페미니즘에 관하여
19세기 말에 시작된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의 주요 관심은 제도적 성평등에 있었다. 이 1물결 페미니즘이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자유와 권리 쟁취에 주목했다면, 1960년대 이후 제2물결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는 것에 주목했다. 즉 남성과 여성이 가진 ‘권력’이 다르다는 차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여성을 피억압자, 피착취자로 내모는 ‘가부장제’라는 불평등한 ‘구조’를 짚어냈다. 더 나아가 제2물결 페미니즘은 단일한 집합체로서의 여성이 아닌 ‘복수로서의 여성’을 발견하고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 차이들이 우리의 존재를 새로이 규명하고 앞날을 향한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가는 힘임을 인식했다.
여성성의 신화
제2물결의 시작은 주부들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혼여성의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행복에 대한 성찰 속에서 완성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행복한 주부’라는 허상을 공격한다. 프리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여성의 선택이 정말 자유로운 선택일까에 대해 질문하고, 그 선택을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동 기제를 신화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프리단은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규정되었던 ‘여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어머니와 주부라는 역할의 틀에서 벗어나, 여성 스스로 여성성에 대해 말하고 규정하기를 주장한다.
여성들이여, 계급의식을 각성해 혁명을 일으키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여성을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계급으로 보는 시각을 통해,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성 계급을 공고히 하는 조건들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파이어스톤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권력 구조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지배와 차별의 근원임을 지적한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 최초의 불평등의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혁명적인 결론은 여성이 생식 수단을 완전히 점유하는 결정권자가 되는 것만이 여태껏 받아온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피력한다.
우리 안의 차이들을 인정하고 연대하기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에 이르러 남녀 간의 차이의 문제가 여성들 간의 차이의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단수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복수로서의 여성’을 보고, 주변화된 힘이 없는 여성들을 북돋아주는(to empower) 일을 정치적 과제로 삼았다. 타자화된 목소리를 북돋는 것이 ‘페미니즘적 실천’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로드의 업적은, 여성들뿐 아니라 더 다양한 범위의 소수자들까지 포함하는 차이의 정치를 실천한다. 그의 이론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힘을 바탕으로 타자와 연대하고, 연대를 통해 다른 대안에 대해 고민하는 힘을 제공해준다.
이처럼 제2물결 페미니즘은 ‘레디컬’하다. 제2물결 페미니즘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왜?’라고 물으며 지금의 질서에 대해 도전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우리는 이 강좌를 들으며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김은주(철학자)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여성주의와 긍정의 윤리학(affirmative ethics): 들뢰즈의 행동학(éthologie)을 기반으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트랜스포지션』(2011, 문화과학사), 『페미니즘을 퀴어링!』(2018, 봄알람) 을 공역, 『공간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이해』(2017, 라움)을 공저했고, 최근에는 여성 철학자의 삶과 사유를 다룬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봄알람)』을 썼다. 논문으로는 「에토스(ethos)로서의 윤리학과 정동」,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 개념과 여성주의적 의미: 새로운 신체 생산과 여성주의 정치」, 「'여성혐오'이후의 여성주의(feminism)의 주체화 전략:혐오의 모방과 혼종적(hybrid)주체성」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