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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모습, 귀족적인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삶은 확실히 ‘귀족주의’라 부를 만한 면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의 귀족주의는, 니체의 귀족주의가 귀족명부에 등장하는 이들과 무관했듯이, 어떤 작위나 재산과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귀족주의는 ‘권력과 부를 향해 기어오르는 원숭이들’(니체)로부터 거리를 두는, 그것으로부터 삶을 방어하려는 고상한 태도이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의 이미지와 상반되기는커녕 그것에 상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모습, 공공연한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지하 음침한 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흥미롭게도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단락을 이렇게 맺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무력적 전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세 번째 모습, 무자비한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종종 차갑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특히 비판 대상에 대해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을 때 그런 느낌이 든다. 그는 분노를 담아둘 내면이 없는 사람처럼 그것을 곧바로 터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공격성에 혀를 내둘렀다. 어떤 이는 마르크스의 ‘스타일’이 그 어원에 충실한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의 스타일은 원래 스틸루스(stylus)가 로마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의 모양 그대로였다. 즉 글을 쓰는 데 쓸 수도 있고 사람을 찌라는 데 쓸 수도 있는, 끝이 날카로운 강철 펜이었다.
네 번째 모습, 국적 없는 마르크스
마르크스를 회고하며 엥겔스는 “인터내셔널이 없는 무어의 삶은 다이아몬드가 깨진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노동자계급에게 제시한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인터내셔널한 구성에 열의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국제노동자협회’ 즉 인터내셔널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하지만 여기서 ‘인터내셔널'이란 국제노동자협회’라는 특정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 혹은 원리로서의 의미이다.
다섯 번째 모습, 공부하는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4년에 이르기까지 자기표현을 빌리면 “공적 무대로부터 서재로 물러났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다. 그는 서재로 물러난 것일까, 서재로 나아간 것일까. 서재는 혁명으로부터 물러난 공간인가, 혁명이 일어난 공간인가. 마르크스의 삶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익숙한 혁명가의 이미지를 정정하게 한다. 혁명적 사상가는 연구를 중단하고 혁명에 뛰어든 자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삶과 세계를 연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이다. 마르크스는 혁명과 공부가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고병권(사회학자)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랫동안 학문자율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니체와 들뢰즈 및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사회적 문제들을 연구하며 집필, 강연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마르크스, 니체, 루쉰, 스피노자 등을 함께 읽고 공부하며 살아간다.
노들장애인야학의 철학 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