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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선언을 통해 시작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고백이라는 선언을 통해서만 시작되고 비로소 사실이 된다고 말했다. “너를 사랑해”라는 발화가 있기에 사랑은 돌연 실존하고, 보여지며, 작동한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지금-여기 있게 하고, 그 힘을 표현하는 능력, 우리는 여기서 선언의 수행적 힘을 본다.
지금 우리의 말은 승인된 말과 승인하는 말 사이에 갇혀 있다. 하나가 길들여지고 복종하는 언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강요하는 권력의 언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 생각하지만 우리의 말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외엔 선택할 여지가 없는 수인(囚人)의 언어일 뿐이다. 반면, 선언은 갇혀 있던 말을 '잠금 해제'하는 마법이자 주문이며, 승인의 굴레를 맴도는 우리의 삶을 재발명하도록 독촉하는 명령으로 제기된다. 선언은 사건의 말이며, 문학은 그 사건적 힘을 불러내는 표현의 형식에 다름 아니다. 선언은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자기 승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선언하는 문학
마리네티, 미래파 선언문의 저자
문학의 역사는 선언의 힘이 사그라든 후 작성된 죽은 말들의 명부일 따름이다. 사건성이 거세된 문학은 이상(李箱)의 말처럼 박제가 된 새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치장할 뿐 변화시키지 못하며, 문학 제도라는 질서에 복무하며 서서히 문학을 질식시킨다. 차라리 문학의 역사를 반추하며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승인하는 힘으로서 말의 역능, 그것이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순간들인 선언의 장면들이어야 한다.
말로써, 글로써 경직된 현실을 촉발하며 균열을 일으키고 파열로 몰아가는 힘의 문학! 랑시에르가 주장했던 치안 너머의 정치로서의 문학이란 그것이 아닐까? 문학사의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 사건적 폭발의 순간들을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보자.
최진석(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창과 교수)
수유너머104 회원. 러시아인문학대학교 문화학 박사. 정통을 벗어난 ‘이단의’ 지식, ‘잡종적’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잡학다식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이 공부길에서 수유너머의 친구들이 (불)친절한 동반자들임에 늘 감사해 한다. 그렉 램버트의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를 번역했고, 『불온한 인문학』 등을 함께 썼다. 이화여자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