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학가를 넘어서
인간 최고의 표현 형태, 소설!
로렌스는 예술 내에서뿐만 아니라 과학이나 철학 등과 비교하여서도 소설이 가장 우월하다고 보며, 더 나아가
무선이나 망원경과 비교하여서도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소설이 이렇게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의 인용문들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소설은 위대한 발견이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이나 누군가의 무선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소설은 이제까지 획득된 인간의 표현의 최고 형태이다.
왜냐고? 절대적인 것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만일 그 소설이 예술이라면,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상대적이다. 교훈적인 부분들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들이 소설은 아니다. 그리고 작가가 소매 안에 교훈적
‘목적’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가들은 교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톨스토이나 플로베르의 것처럼 사악한 교훈적인 목적조차도 소설을 죽일 수는 없다. ("The Novel", Phoenix II,
416)
D. H. 로렌스(1885~1930)
로렌스의 문학 연구
로렌스는 어떤 식으로 미국 고전 문학을 연구하는가? 이미 존재하는 어떤 문학 이론을 적용하는 식도 아니고,
작품의 이른바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식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의미의 성격론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로렌스의 방법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① 역사적이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새로움이라는 관점에서 본 삶의
역사이다.
② 경험의 새로움의 곧 인간 형상의 새로움으로 나타난다. 로렌스의 입장에서 본 새로운 삶이란 곧 새로운 인간 형상의 발생이다. (니체,
맑스)
그렇다면 인간 형상의 핵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로렌스와 포르노그래피
포르노그래피를 저속하다고 치자. 그래서 싫어한다고 치자. 그런데 왜 싫어하는 것일까? 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로렌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런 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이 적절하게 자극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흐린 날의 햇볕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자극한다.” 청교주의(puritanism)를 1-2세기
겪었으나 이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맞는 말이다. 어떤 형태의 성이든 비난하는 군중-습성이 너무 강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물론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성적 감정이 이는 것을 정말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이웃을 증오하는 데로 빠진 왜곡된 사람들이다―좌절, 실망, 미성취. 우리의 문명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항상 어떤 단순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성흥분을 몰래 즐긴다.”
로렌스의 프로이트 비판
로렌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이해하는 단서는 무의식이 아니라 성이라고
한다. 모든 활동에 성적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를 성적 성취로 되몰아감으로써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로렌스는 말한다. 인간을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는 로렌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목적의 붕괴”를 가져온다.
로렌스는 모든 활동에 성적 동기를 부여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틀린 경우로서 아이의 경우를 거론한다. 그는 아이에게는 실재적인 성적 동기가 존재하지 않음이 명확하다고 한다. 거대한 성적 중심들이 깨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물론 세 살짜리 아이에게도 성의 그림자가 비치기는 하지만, 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생물학적 중심들로부터의 부자연스러운 침입”일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이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조용히,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림자인 듯이 넘어가야지, 절대로 열을 내고 혼을 낸다든지 해서 의식으로 끌어들이게 하지 말라고 한다. 수치나 공포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로렌스와 성경 그리고 독서
로렌스는 본능적으로 성경을 원망했다고 한다. 그가 기록하는 성경공부(?)의 기억은
이렇다.
“성경은 땅을 세게 밟는 수많은 발자국들처럼 말의 형태로 의식 속에 밟아 넣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발자국들이란 것이 항상 기계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해석이 고정되어 있어서 모든 진정한 관심이 상실되었다.”
『묵시록』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고 로렌스는 말한다. 여기서 로렌스는 ‘고정된 해석’과 반대되는 독서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어떤 책이 일단 파헤쳐지면, 일단 알려져서 그 의미가 고정되거나 세워지면, 그 책은 죽은 것이다. 책은
우리를 감동시킬 힘, 우리를 이전과는 다르게 감동시킬 힘이 있는 동안에만 살아있다. 즉 우리가 그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한에서만 살아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한번 읽으면 그뿐인 천박한 책들의 홍수로 인하여
현대인은 모든 책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한번 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여러 책을 읽는 것보다 책 하나를 여섯 번 읽는 것이 훨씬, 훨씬 더 낫다. 만일 어떤 책이 당신으로 하여금 여섯 번 읽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매번 더 깊은 경험이 될 터이고, 정서적 측면과 지적 측면을 모두 합한 당신의 영혼 전체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정남영(경원대 교수, 문학비평가)
서울대학원 영문학과에서 찰스 디킨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로서 디킨즈, 로렌스 등 영미작가와 영미소설을 주로 연구해 왔으며, 동시에 안토니오 네그리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몇 편의 저서를 번역, 집필하였다. 현재, 경원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중지성의 정원>의 상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