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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한바탕 놀아보자!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원초적이다. 이러한 질문이라면 아트앤스터디에서 철학 강의를 했던 선생님 누구나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의를 선택하는 수강자의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이러한 생각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철학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아무리 좁고 전문적인 강의라도 그에 따른 해석과 강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헌식 성생님이 가진 '철학'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
"큰 테두리에서 볼 때, '혼돈의 극복'이라고 하는 문제는 철학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혼돈이라는 말, Chaos라고 하는 말은 이 세계의 가장 큰 울타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 갇혀 있는 marginal한 상태, 가장 넓혀져 있는 상태의 Chaos인 것입니다. 극복도 마찬가지 입니다. 극복도 타 학문처럼 좁은 울타리가 아니라 가장 넓은 울타리. 그 울타리에서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철학은 이런 겁니다."
플라톤과 매트릭스
매트릭스 안의 '가상의 인간'과 매트릭스 밖의 '실재의 인간'의 차이는 '현상계의 인간'과 '이데아계의 인간'의 차이로 볼 수 있다. 프로그램으로서의 매트릭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매트릭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가짜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제 세계, 즉 실상은 따로 있다.이 놀라운 사실을 네오가 깨닫게 되면서 매트릭스를 조작하는 악의 무리를 물리쳐 인간이 가상현실의 노예로 전락하는 데에서 구현한다는 것이 <매트릭스>의 전체적인 스토리이다.
아무튼 이 영화를 비롯한 많은 SF영화들은 플라톤적인 이데아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플라톤의 주저<국가론>7권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네오가 어떻게 구세주로 등장하는지 그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합리주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이성은 수학의 핵심이자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사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누구나 조만간에 모든 기술을 습득하게 될 것이다."
그는 18살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온한 중상층의 삶을 바라는 부모의 충고를 저버리고 순전히 세상 구경을 할 목적으로 배를 탄 인물이었다. 그 이전에 아무런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거나 다룬 경험을 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그거 삶의 터전을 가꿀 수 있었을까를 이해하는 데 위 문장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경험이 없다고 해서 무(無)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위 문장은 보여주고 있다. '생각을 잘해서 계획하면(contrive)' 자기가 만들어 보지 않았던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도 없고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이성-수학-합리적'의 연결고리에서 찾고 있다.
헤겔과 변증법
헤겔은 보통 그의 변증법(dialectic)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변증법은 그가 처음 만든것이 아니라 이전의 플라톤이나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말인데 그는 이를 좀 더 다이내믹하게 소위 '정(正)-반(反)-합(合)'의 운동원리로 체계화했다고 해서 그를 변증법의 대부 격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특히 이성을 그 자체로 완결된 원리가 아니라 완결을 기다리는 가능태로 보았으며 완결은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될 때에만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태(potentiality)와 현실태(actuality)에 대한 발상을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 왔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dynamis)에서 현실태(energeia)로의 이행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기본 운동으로 파악했다. 꽃씨가 나중에 꽃이 되는 것은 꽃씨 안에 꽃이 될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씨가 가능태라면 꽃은 현실태인 것이다.
'팔자소관'이란 없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조장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능력이라는 자연적인 조건 그리고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의 작용에서 기인하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조건 그리고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의 작용에서 기인하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팔자소관'이라는 말은 그렇다. '팔자소관'이란 한 마디로 현재의 상황을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패배주의 무력감이 들어서게 된다. '팔자'를 개인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인 힘이라든지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의 작용으로 이해할 경우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안일한 자기 변명에 자신의 삶을 가두는 태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저항했던 것이다. 불행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 의해서 조장되는 한에서 그 집단에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는 있다. 이러한 적극적 실천을 통해서만 인간은 역사의 주체로서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모든 신뢰, 양심, 진실이라는 것은 감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 나오는 말이다. 좀 더 처절한 구절을 들어보자! "모든 글 가운데에서 나는 피로 쓴 글만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우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피로 쓸 것! 감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글은 글이 아니다. 자신의 정신이 아니라 신체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수반되지 않는 언행은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의지는 감성적이고 신체적인 것이지 이성적이고 정신적이지 않으며, 이 사실에 충실할 경우 인강의 언행은 이를 바탕으로 출발하고 또 마무리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그러니까 삶의 부수적이고 과도기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감성이 그 밑바닥 또는 중심에서 항상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감성은 인간 삶의 토대이며 축으로 항상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헌식(단국대 철학과 교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전공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터넷 철학카페 '소피의 세계'를 주관, 문예아카데미에서 청소년 철학교실을 운영했으며, 세종대, 연세대 등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철학 전반을 주제로 강의해 왔다. 세종대 겸임 교수를 거쳐, 현재 계간 '철학과 현실', '헤겔 연구'의 편집위원 및 텍스트 해석 연구소 소장으로 삶과 철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연구 및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