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년 5월 쾨니히스베르크의 어느 밤. 이마누엘 칸트는 12년간 집필해온 '순수이성비판'의 마지막 원고를 완성하고 있었다. 촛불이 깜빡이는 서재에서 57세의 철학자는 인간 이성의 경계를 그어내는 마지막 문장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5월의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칸트는 자신이 방금 완성한 것이 철학사 전체를 뒤흔들 지진과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칸트는 깃털 펜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는 지난 12년간 써내려간 수백 장의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나는 지식을 제한해야만 했다. 그래야 믿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칸트의 머릿속에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철학계의 격렬한 논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편에서는 흄과 같은 경험론자들이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이 "진정한 지식은 순수한 이성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맞섰다.
칸트는 자신의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는 흄의 '인간 지성에 관한 연구'가, 다른 쪽에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꽂혀 있었다. 그들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결국 서로 다른 길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었다.
"경험론자들은 옳다.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칸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이 있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구조 때문이 아닌가?"
칸트는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거리가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집들, 가로등, 그리고 하늘의 별들.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저 별들을 본다고 하자." 칸트는 창문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저 별을 '저기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저기'라는 공간과 '지금' 보고 있다는 시간은 저 별 자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인식 능력에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칸트가 12년간 고민해온 핵심 문제였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때, 무엇이 대상에서 오고 무엇이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가? 합리론자들은 모든 것을 이성으로 설명하려 했고, 경험론자들은 모든 것을 감각 경험으로 환원하려 했다. 하지만 둘 다 놓친 것이 있었다.
칸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눈에는 완성된 원고가 들어왔다. 저기에는 자신만의 해답이 담겨 있었다.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는 제3의 길. 그는 이것을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불렀다.
"7 더하기 5는 12다." 칸트는 간단한 예를 떠올렸다. "이것은 경험하기 전에도 참이다. 하지만 단순히 개념 분석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7이라는 개념 안에 12가 들어있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인간의 인식 구조에 있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고, 인과관계라는 범주로 세상을 이해한다. 이것들은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칸트는 원고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가르쳐주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우리는 현상의 세계, 즉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만을 알 수 있다. 사물 자체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자유와 도덕,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문득 칸트는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들려준 성경 이야기에서 신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철학자가 된 지금,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한계 때문에 믿음과 희망의 자리가 생긴다.
촛불이 깜빡거렸다. 칸트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12년간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그는 원고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면 철학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어렵고 낯선 이야기일 테니까.
하지만 칸트는 확신했다. 자신이 찾은 길이 옳다는 것을. 인간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그래야만 독단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회의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과학적 지식과 도덕적 믿음이 각자의 영역에서 당당히 설 수 있다.
칸트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철학사에도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원고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내일이면 출판사에 이 원고를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영원히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