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한 카페의 조용한 코너. 창밖으로는 네온사인들이 깜박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간다. 아트걸은 노트북을 열고 자료를 정리하며 상상 속의 대화 상대를 떠올린다. 만약 백남준이 지금 이 시대를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텔레비전을 해킹하고, 비디오를 조각으로 만들며, 전자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 남자와의 가상 대담이 시작된다.)
비디오 아트의 탄생과 혁명
아트걸: 선생님, 1965년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로 첫 비디오 아트를 만드셨을 때의 기분이 어떠셨나요?
백남준: 그때는 정말 흥미진진했어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직접 다룰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거든요. 나는 텔레비전을 해킹한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숨겨진 가능성을 깨워준 것뿐이에요.
아트걸: 당시에는 비디오 아트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을 텐데요.
백남준: 그래서 더 재미있었죠.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밖에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안의 전자 신호를 조작하고, 화면을 왜곡시키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어요. 마치 피카소가 캔버스 위에서 형태를 해체했듯이, 나는 전자 화면 위에서 시간과 이미지를 해체한 거죠.
기술과 예술의 만남
아트걸: 선생님께서는 항상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강조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백남준: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를 반영해야 해요.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화가 새로운 기술이었고, 19세기에는 사진이 혁신이었죠. 20세기에는 전자 기술이 우리 삶을 바꾸고 있었어요. 나는 단순히 새로운 도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만들려고 했던 거예요.
아트걸: 지금은 AI와 가상현실이 새로운 기술로 떠오르고 있어요. 이런 기술들을 어떻게 보시나요?
백남준: 아, 정말 흥미롭네요! 내가 1974년에 '전자 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인터넷이 바로 그 전자 고속도로 아닌가요? AI는 이제 그 다음 단계죠. 기계가 학습하고 창작하는 시대, 정말 멋지지 않나요?
글로벌 아트와 소통의 미학
아트걸: 선생님의 작품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한 획기적인 작품이었어요.
백남준: 1984년 1월 1일, 뉴욕과 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해서 생방송 예술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확신했어요. 언젠가는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라고요.
아트걸: 지금은 SNS로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예언이 현실이 된 셈이네요.
백남준: 맞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느냐예요. 지금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 그것도 일종의 비디오 아트죠.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예요.
텔레비전 부처와 철학적 사유
아트걸: '텔레비전 부처' 시리즈는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기술과 영성의 만남이라고 할까요?
백남준: 그 작품을 통해 나는 질문하고 싶었어요.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지는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부처님을 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까? 실시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트걸: 지금 시대에는 가상현실 속에서 명상을 하는 앱들도 나오고 있어요.
백남준: 그것 참 흥미롭네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에요. 기술이 우리를 더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산만하게 만드는가? 그것이 핵심 질문이죠.
미래의 예술가들에게
아트걸: 마지막으로, 지금 시대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백남준: 두려워하지 마세요. 새로운 기술을 만나면 놀아보세요. 실험해보세요. 실패해도 괜찮아요. 나도 수많은 실패를 통해 배웠거든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다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에요. 예술은 결국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니까요.
창밖의 네온사인이 더욱 화려하게 번쩍인다. 아트걸은 노트북을 덮으며 생각한다. 백남준이 꿈꾸었던 전자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지금 어떤 예술을 만들어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