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이라는 한자어가 서구로 건너가면서 겪은 변화는 번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다. 이 단어는 단순한 언어적 이동을 넘어서 철학적 개념 자체의 변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가 되었다.
한문에서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지만, 이는 단순한 물리적 중간점이 아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중'은 치우치지 않음(不偏)과 기울지 않음(不倚)을 뜻한다. 여기서 핵심은 정적인 균형점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적절함을 찾아가는 동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용(庸)'은 평상(平常)을 의미하되, 이는 평범함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원리, 즉 '불변의 도리'를 가리킨다.
서구식 해석의 함정
그런데 이 개념이 19세기 서구로 번역되면서 'moderation' 또는 'golden mean'으로 옮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한 '황금 평균(golden mean)' 개념과 혼동된 것이다. 서구의 '중용'은 극단 사이의 산술적 중간점을 찾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용기는 겁쟁이와 무모함 사이의 중간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동양의 중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중용지위덕야 기지지구의(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중용을 덕으로 삼는 것, 그보다 더 지극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는 중용을 최고의 덕목으로 평가했다. 이는 상황적 맥락 속에서 가장 적절한 반응을 찾아내는 실천적 지혜를 의미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본 번역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지적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기호체계가 아니라 삶의 형식(form of life)이다. '중용'이라는 개념이 서구로 번역될 때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 개념이 형성된 문화적 맥락 전체였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번역을 단순한 언어 전환이 아니라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으로 보았다. 하지만 중용의 경우, 융합보다는 오히려 서구적 지평이 동양적 지평을 덮어버린 사례에 가깝다.
현대적 재해석의 필요성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적당히', '중간쯤', '무난하게' 같은 표현들은 모두 서구식으로 변질된 중용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원래 중용의 의미를 되찾으려면 상황적 지혜와 실천적 판단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때 언제는 엄하게, 언제는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진정한 중용이다. 이는 언제나 '중간 정도로'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반응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중용의 본래 의미다.
언어의 정치학과 문화적 헤게모니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는 번역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번역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역설을 지적한 것이다. 중용 개념의 변질은 이러한 번역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문화적 우위에 있는 언어가 다른 문화의 개념을 자신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드러낸다.
특히 19세기 서구 중심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이루어진 번역들은 동양의 철학적 개념들을 서구 철학의 하위 범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중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황금 평균과 동일시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론: 개념의 본래성 회복을 위하여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틀이자 세계관의 표현이다. 중용 개념의 경우, 동양적 사유의 독특함을 서구적 틀로 재단하면서 그 본래의 깊이와 풍부함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역된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맥락 속에서 그 개념이 지닌 고유한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중용은 타협이나 절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최선의 실천적 선택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용을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