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 가을, 베를린 대학교 근처의 한 작은 카페. 헤겔이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났지만, 그의 거대한 철학 체계는 여전히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30세의 덴마크 청년 쇠렌 키르케고르가 우연히 헤겔학파의 젊은 철학자 카를 로젠크란츠와 마주앉게 된다. 창밖으로는 베를린의 가을 낙엽이 흩날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철학사를 바꿀 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카페 안은 담배 연기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베를린 대학교 근처라서 그런지 곳곳에서 독일어로 철학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키르케고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기장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맞은편 테이블의 중년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실례지만, 혹시 덴마크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억양이 특이해서요."
키르케고르가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은 단정한 옷차림의 학자 같은 인상이었다.
"맞습니다. 코펜하겐에서 왔습니다. 저는 쇠렌 키르케고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카를 로젠크란츠입니다.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헤겔 선생님의 제자였죠."
키르케고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헤겔학파라니. 그가 평생 비판하고 싶었던 대상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헤겔 말입니까? 흥미롭군요. 저는 오히려 그분의 철학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로젠크란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문이라뇨? 헤겔의 체계만큼 완벽한 철학이 또 있을까요?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가는 변증법적 과정, 절대정신에 이르는 필연적 발전..."
"바로 그겁니다." 키르케고르가 끼어들었다. "그 '체계'라는 것 말입니다. 헤겔은 모든 것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 안에 집어넣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가장 중요한 것이라니요?"
"개인입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 개인 말입니다."
로젠크란츠는 커피 잔을 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개인도 절대정신으로 향하는 과정의 한 단계 아닙니까? 개별성은 결국 보편성으로 지양되는 것이고요."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키르케고르의 목소리에 열정이 실렸다. "헤겔에게 개인은 단지 보편적 이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해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고민하고 선택하고 고뇌하는 구체적인 개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로젠크란츠가 잠시 말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성만으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지 않습니까? 객관적 진리, 보편적 진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객관적 진리?" 키르케고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를 들어보죠. 지금 제가 이 여인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이것을 헤겔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구체적 개인들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하겠죠?"
"그렇게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그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그녀를 만날지 말지 선택하고, 결혼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은 어디로 갔습니까?"
로젠크란츠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개별적 현상이니까 보편적 진리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부차적이라고요?" 키르케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것이 헤겔 철학의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실제로 살아가는 개인의 실존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 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했다. "저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모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직업을 가질 것인가, 다른 것을 선택할 것인가. 헤겔의 체계는 이런 구체적인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체계적 사고를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키르케고르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진정한 선택은 체계적 사고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미래에 대한 도약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로의 질적 도약 말입니다."
"질적 도약이라고 하시면?"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지금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합시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신의 존재를 수학 정리처럼 논증할 수 있습니까?"
로젠크란츠가 머뭇거렸다. "헤겔은 종교도 절대정신의 한 형태라고..."
"바로 그겁니다!" 키르케고르가 손을 책상에 내리쳤다. "헤겔은 신앙조차 이성적 체계 안에 집어넣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니, 이성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성에 반한다니요?"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세요. 신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이성적이었습니까? 윤리적이었습니까? 절대 아니죠.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입니다."
로젠크란츠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당신은 이성을 포기하자는 말입니까?"
"포기가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자는 겁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헤겔의 오만함을 버리고, 인간 실존의 근본적 한계와 불안을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불안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키르케고르의 눈빛이 깊어졌다. "불안은 자유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입니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서 있을 때 느끼는 떨림이죠. 아담이 선악과 앞에서 느꼈던 그 감정 말입니다."
"그럼 불안은 나쁜 것입니까?"
"아니요. 오히려 불안이야말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아요. 본능에 따라 살면 되니까. 하지만 인간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로젠크란츠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럼 당신이 추구하는 철학은 무엇입니까?"
"개인의 철학입니다. 각자가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가는 주관적 진리의 철학이에요. 헤겔처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객관적 체계가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실존적 진리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면 진리 자체가 의미를 잃지 않을까요?"
키르케고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관적 진리야말로 가장 강력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전 존재를 걸고 선택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전 존재를 건다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진리입니까? 아니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진리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관적 진리의 힘입니다."
로젠크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관점이군요. 하지만 그럼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철학이 삶과 분리된 추상적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어야 해요. 헤겔은 철학을 거대한 이론 체계로 만들었지만, 정작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잠시 멈춘 후 계속했다. "저는 이것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요?"
"헤겔은 모든 것에 미리 정해진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실은 그 본질이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하죠. 하지만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어요.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갑니다."
로젠크란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인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본질을 갖지 않는 것, 즉 자유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기투하는 존재입니다."
"기투한다는 것은?"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 양식입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카페 안에 노란 불빛이 켜지고,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져갔다.
로젠크란츠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당신이 보기에 진정한 개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키르케고르가 손가락을 펼치며 설명했다. "첫 번째는 미적 단계입니다.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단계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 단계입니다. 보편적 도덕법칙을 따르며 사는 단계입니다. 칸트가 추구했던 단계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 마지막은?"
"종교적 단계입니다.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되는 단계입니다. 이때 개인은 그 어떤 보편적 규칙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신과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결정합니다."
로젠크란츠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런 개인주의가 사회를 해치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진정한 개인이 될 때만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로젠크란츠 교수님, 저는 헤겔의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체계와 더불어 개인이 있어야 하고, 객관성과 더불어 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과 더불어 실존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들을 책으로 쓸 계획은 없으십니까?"
키르케고르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개인이 인생의 기로에서 내려야 하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죠."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베를린의 가을 거리를 걸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방금 전한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개인의 실존, 주관적 진리,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의 사상은 훗날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1843년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시작된 대화는 철학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헤겔의 거대한 체계에 맞서 개인의 소중함을 외친 키르케고르의 외침은, 한 세기 후 사르트르, 카뮈, 하이데거 등에 의해 현대 실존주의로 꽃피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