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20세기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상가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인 그는 『전체와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을 통해 기존 서구 철학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며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었다.
서구 철학의 전체주의적 경향
레비나스는 플라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 전통이 '전체성'의 논리에 지배되어 왔다고 진단한다. 이는 모든 존재와 사유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전체주의적'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성의 철학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킨다. 즉, 나와 다른 존재를 나의 이해 틀 안에서만 파악하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나는 외국인을 우리 문화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려 하는 것과 같다.
타자의 얼굴과 무한의 현현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체성의 폭력에 맞서 '무한'의 개념을 제시한다. 무한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현현한다. 여기서 '얼굴'은 단순한 생물학적 얼굴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가리키는 철학적 개념이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모든 이해와 파악을 넘어선다. 길에서 마주치는 거지의 얼굴, 고통받는 이웃의 얼굴은 나에게 무언의 명령을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원초적 윤리적 명령이 그것이다. 이 명령은 어떤 논리적 근거나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타자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절대적 요구다.
동일자에서 타자로의 운동
기존 철학은 주체가 세계를 인식하고 소유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도 결국 '나'라는 주체의 확실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러한 주체 중심적 사고를 뒤집는다.
진정한 철학적 사유는 동일자(나)에서 타자로 향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는 나의 안락한 집에서 나와 낯선 타자를 만나는 여행과 같다. 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타자의 고유성을 어떻게 존중하느냐다.
향유와 거주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우선 '향유'의 단계를 거친다. 음식을 먹고, 햇볕을 쬐고,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는 아직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원초적 관계다.
다음 단계는 '거주'다. 집을 짓고 소유하면서 인간은 세계에 정착한다. 집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타자를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집의 문을 연다는 것은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환대의 시작이다.
여성성과 환대
레비나스는 환대의 원형을 '여성성'에서 찾는다. 여기서 여성성은 생물학적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원리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는 것처럼, 집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여성적 원리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길을 제시한다.
시간과 죽음
전체성의 철학은 시간을 공간화하려 한다. 모든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환원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의 철학에서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일회성을 갖는다. 특히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이다.
죽음은 나의 모든 프로젝트와 의미를 무화시킨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은 전체성의 환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고, 타자의 고통에 더욱 민감해진다.
윤리학의 새로운 정초
레비나스는 존재론보다 윤리학이 제일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에 대한 물음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서구 철학사에서 혁명적인 전환이다.
윤리는 법칙이나 규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과의 직접적 만남에서 생겨난다. 굶주린 아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윤리적 관계 안에 들어서 있다. 이 관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요구다.
정치와 정의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타자들이 존재한다. 제3자의 등장과 함께 정치와 정의의 문제가 대두된다. 여러 타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것인가가 정치의 과제다.
하지만 정치는 결코 윤리를 대체할 수 없다. 정의는 항상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라는 윤리적 요구에 의해 견제받아야 한다. 법과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타자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와 가르침
타자와의 만남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언어는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타자의 현현 방식이다. 타자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동시에 나를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일방적인 전수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가르침은 스승이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때 일어난다. 타자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종교와 초월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종교는 '재결합'을 의미하는 어원적 의미와는 다르다. 오히려 종교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절대적 분리를 유지하면서도 관계를 맺는 역설적 구조다.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서 흔적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종교적 차원은 특정 종교 교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개방성, 초월에 대한 갈망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종교적 차원이다.
『전체와 무한』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레비나스는 이성과 체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그의 타자의 윤리학은 오늘날 다문화 사회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주요인용문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나를 초대한다. 그 의미의 명증성은 그 의미의 독특함, 즉 얼굴에 고유한 의미 작용에서 나온다."
"윤리학은 제일철학이다."
"무한의 관념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타자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심지어 그가 나에 대해 범하는 범죄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얼굴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 얼굴은 최초의 말, 최초의 단어이다."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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