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선택한다. 어떤 커피를 마실지, 어떤 음악을 들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이런 사소한 선택들이 단순한 개인 취향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에게 취향은 결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고 계급을 재생산하는 강력한 도구다.
취향 뒤에 숨은 계급의 그림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는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실증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사람들의 문화적 실천과 취향이 어떻게 사회적 계급과 연결되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샹송을 선호하는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음악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명확한 계급적 차이가 존재했다.
상류층은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바흐의 푸가를 선호했고, 중간층은 비발디나 쇼팽 같은 상대적으로 친숙한 클래식을 좋아했다. 반면 노동계급은 샹송이나 민요를 즐겼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각 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부합하는 문화적 코드를 체득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다른 계급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문화자본이라는 새로운 화폐
부르디외가 제시한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문화자본'이다. 경제자본이 돈과 재산을 의미한다면, 문화자본은 교육, 지식, 취향, 매너 등 문화적 능력과 자산을 뜻한다. 이 문화자본은 경제자본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적 자원이다.
예를 들어, 같은 대학을 졸업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명은 어릴 때부터 클래식 콘서트를 다니며 미술관을 자주 방문했고, 다른 한 명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둘이 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중요한 클라이언트와 만날 때, 문화자본을 갖춘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며 신뢰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문화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어색함을 느끼거나 소외감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자본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위한 실질적인 도구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화자본이 대부분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수된다는 점이다. 부모의 계급적 지위가 자녀의 문화자본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이는 계급 재생산의 핵심 메커니즘이 된다.
일상 속 구별 짓기의 실제
부르디외의 이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생생하게 확인된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라떼를 마시며 맥북으로 작업하는 사람과 동네 다방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단순히 경제적 여유의 차이일까?
그보다는 각자가 속한 사회적 집단의 문화적 코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톨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샷 추가"라고 주문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실천이며, 이는 특정한 라이프스타일과 계급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호다.
요즘 유행하는 '가성비'나 '가심비'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다. '가심비'를 추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순히 마음의 만족을 중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보다 정서적 가치를 우선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계급적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취향의 정치학과 사회적 책임
부르디외의 분석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취향이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개인적 선택"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의 일부다.
취향의 판단들은 무엇보다도 타자의 취향에 대한 거부이다. - 『구별 짓기』, 피에르 부르디외
이 통찰은 단순히 사회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들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성찰하게 만든다. 고급 와인을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문제다.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음악이나 순수문학을 가르치는 것 자체는 의미 있지만, 그것을 문화적 우월성의 근거로 삼아 다른 문화 형태를 폄하한다면 이는 계급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일이 된다.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이론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통해 우리는 더 성찰적이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취향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취향이 만드는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부르디외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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