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논어』를 접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번역본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한문 원전과 번역본 사이에는 상상 이상의 간극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 사상과 철학 자체가 다르게 해석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한문의 함축성과 다의성
한문의 가장 큰 특징은 극도의 함축성에 있다. 예를 들어 『논어』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보자. 현재 우리가 흔히 아는 번역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하지만 한문 원전을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한 의미층이 드러난다.
'學'이라는 글자 하나만 해도 '배우다', '깨닫다', '본받다' 등 여러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時'는 단순히 '때때로'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시의적절하게'라는 뜻이 더 강하다. '習'은 '익히다'를 넘어서 '체화하다', '몸에 배게 하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배움을 적절한 시기에 몸에 체화시키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단순한 학습의 즐거움이 아니라 앎과 삶이 일치되는 경지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번역의 한계와 문화적 맥락
번역의 근본적 한계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틀 자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한문으로 사유하는 것과 한글로 사유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예를 들어 '仁'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를 '인(仁)'이라고 그대로 쓰면 여전히 한문의 뉘앙스가 남아있지만, '사랑', '인간애', '박애' 등으로 번역하는 순간 원래 의미는 상당 부분 소실된다. '仁'은 사람(人) 둘(二)이 함께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글자로,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 인간관계의 본질적 조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읽기 방식의 차이
한문을 읽는 방식 자체도 독특하다. 한문은 기본적으로 문맥에 의존하는 언어다.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고, 시제 표현도 모호하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공자의 "溫故而知新"을 보자. 직역하면 "옛것을 따뜻하게 하여 새것을 안다"가 된다. 여기서 '溫'은 단순히 '다시 보다'가 아니라 '정성을 다해 살피다', '마음을 기울여 되새기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과거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한문은 독자의 해석 능력과 철학적 성찰을 전제로 한다. 반면 번역본은 번역자의 해석이 이미 고정되어 있어서, 독자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발견할 여지가 줄어든다.
현대적 읽기의 가능성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떻게 『논어』를 읽어야 할까? 한문을 모르면 아예 읽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번역본의 한계를 인식하고, 가능한 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君子不器"라는 구절을 보자. 일반적으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로 번역되는데, 이는 "군자는 한 가지 기능에만 매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번역자는 "군자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경우 "군자는 타인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이처럼 다양한 번역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원문의 풍부한 의미층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핵심 개념들은 한자 그대로 익혀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철학적 사유의 깊이
결국 『논어』의 진정한 가치는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한문 원전이 지닌 모호성과 다의성은 바로 이런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현대인이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고전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2500년 전 사상가와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고민에 관한 것이다.
번역본으로 시작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려는 자세다. 결국 고전 읽기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