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술, 자연의 경계를 해체하며 새로운 관계성을 제시한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다. 이 인용문은 그녀의 핵심 사상인 '얽힘(entanglement)' 개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고, 모든 존재들이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함께 진화한다는 혁신적 관점을 담고 있다.
원문 맥락
"우리는 인간과 자연, 마음과 몸,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인간과 기술, 자연은 서로 얽혀 있다. 이러한 얽힘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이러한 경계 해체의 상징이며, 우리 모두는 이미 사이보그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출전: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 1985)
해러웨이의 사상은 1980년대 컴퓨터 혁명과 생명공학의 발달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기존의 서구 철학이 인간을 자연과 기술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존재로 보는 관점을 비판했다. 대신 모든 존재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경계의 해체와 새로운 정체성
해러웨이가 말하는 '얽힘'은 단순한 상호작용을 넘어선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술과 분리될 수 없다. 병원에서 사용되는 의료기기부터 시작해서, 언어라는 기술, 도구 사용,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환경까지 우리 삶은 기술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분리될 수 없다. 우리 몸속의 미생물들, 호흡하는 공기, 먹는 음식을 통해 자연과 끊임없이 물질을 교환한다. 심지어 우리의 유전자도 바이러스와의 오랜 공진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해러웨이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봤다. 순수한 인간, 순수한 자연, 순수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혼종적이고 경계가 모호하다.
사이보그적 존재로서의 인간
해러웨이의 대표작인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공상과학의 상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리킨다. 콘택트렌즈를 끼거나 심장 박동기를 이식받은 사람만이 사이보그가 아니다. 컴퓨터로 일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각종 앱을 통해 소통하는 우리 모두가 이미 사이보그적 존재다.
이런 관점은 기술을 인간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으로 보거나, 인간이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도구로 보는 기존 시각을 넘어선다. 기술과 인간은 함께 진화하는 동반자다. 기술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인간도 기술을 변화시킨다.
종간 공생과 생태적 사유
해러웨이의 후기 작업에서는 이런 사유가 더욱 확장된다. 인간은 다른 종들과도 얽혀 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 농업을 통한 식물과의 공진화, 미생물과의 공생 등을 통해 인간은 다종적(multispecies) 존재로 살아간다.
현재의 기후위기나 생태위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얽힘의 결과다. 해결책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아니라 더 나은 형태의 얽힘을 만드는 것이다.
해러웨이의 사상은 오늘날 인공지능, 바이오테크놀로지, 기후변화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순수한 인간성을 지키려는 시도보다는, 기술과 자연과 함께 어떻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그녀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