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강좌는 세 가지 개념, 즉 변증법적 이미지, 유사성,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 벤야민 특유의 철학함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벤야민의 철학은 전통적인 사유 모델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도전장을 던지는가? 그것을 밝히는 일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이미 함축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심층에 자리한 그의 철학적 성찰을 들여다보고 싶거나, 그의 글을 한 번쯤은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강좌를 권한다.
벤야민스러운 철학 개념들 격파하기
▶벤야민의 철학! 서구 전통철학과 차별성을 갖다.
변증법적 이미지,유사성,기억이라는 세가지 개념은 벤야민의 후기 저작단계에 등장하는 사상적 지층들로, 역사철학,언어철학,문예비평 및
시학적 실천텍스트을 대변하고 있다.
이들 각각은 서로 상이한 주제 및 텍스트들에 산재해 있는 만큼 독립적인 고찰이 불가피한 한편,
그 심층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벤야민의 철학적 주된 관심사, 즉 비판적 인식론을 중심으로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한 교차점이 반드시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를 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가지 개념 속에서 전개되는 이론적 기본 구상 및 내용이
서구 전통철학과 차별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벤야민 철학의 독특성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 '변증법적 이미지' 벤야민스러운 사유
'법증법적 이미지'는 벤야민이 고안한 표현법이다. 이 용법은 서양 철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철학적 개념의 전통에 비추어보면 '변증법'이나 '이미지'라는 말이 그리 생소할 것도 없으나, 이 두 개념을 같이 붙여 쓴 양상은 일견 상호
모순적인정도가 아니라 정면충돌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매혹으로 작용하여
'벤야민스러운'사유를 특정짓는 개념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이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사유구조 및 내용이 무엇인가를 따져본다면, 벤야민스럽다는 성격을 해명하는데 있어 변증법적
이미지만큼 불명확하고 정리가 안 된 것도 없으며, 오늘날 벤야민 연구에서 가장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용법만으로 보자면, 벤야민은 이미지계에 변증법벅 구조가 있다고 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외견상 사유와 이미지간에 존재하는 간극
내지 긴장관계가 단숨에 해소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벤야민 언어철학의 핵심! '유사성'
유사성은 벤야민의 사상 전반에 기반이 되는
언어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유사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후기 언어론, 특히「유사성론」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라는 글들이다. 그 외 「언어 사회학의
문제들」이라는 소고는 당대 언어이론을 개괄하는 서평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벤야민 자신의 언어관을 반영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서평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벤야민의 후기 언어이론을 초기 언어이론과 비교해 볼 때, 논리 전개의 기저에 놓인
역사철학적 통찰이냐 문제의 범주 등에서 커다란 편차를 보이지는 않지만, 「유사성론」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라는 짤막한 논고들은 인간학적
고찰방식을 중심으로 언어의 문제를 재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석들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초기 언어론에서는
성경을 인류의 최초 문자문화로 보는 암묵적인 가정 속에서 성경 텍스트의 분석을 바탕으로 자연의 언어 및 인간의 언어를 도출하고 있는 반면, 후기
언어이론에서는 바로 자연 및 인간의 언어르 미메시스라는 인간학적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후기 저술은 언어철학의 문제의식
보다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유사성 개념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 근대 역사관 속에서 사장(死藏)되어버린 '기억'
기억은 서양 전통에서 문화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억은 제의적 성격을 띤 사회적 실천 형태나
구술 또는 문자기록을 통해 인간의 삶의 유한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의 마감으로 생겨나는 시공간적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은 기억을 통해 후대에 전래됨으로써 특정 집단의 정체성으로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역사이고 또 역사적 정체성이다. 그러나 기억의 문화는 17세 기경부터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근대 역사관이 등장하면서 기억은
적확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것으로 폄하되었으며, 그 자리를 대시한 것이 과학적 역사관, 사실관계 속에서 만 인정되는 이른바
'객관적' 사료더미였다. 그러한 와중에 기억의 문화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있는데,
예술이 바로 그것이다.
▶프루수트는 벤야민의 서포터?
벤야민의 「파사주」 프로젝트가 비판적인 역사 인식의 전前과학적 범주로서 사회적 성격을 갖는 집단적 기억 모색하고 있다면,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개인사를 축으로 기억의 경험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이 둘 모두의
시도에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이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벤야민이 지적하고 있듯이 프루스트의 기억은 개인적 기억이다. 프루스트의 기억은
한 고립된 개인이 과거로부터 취득한 일종의 재산목록과도 같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기억 형태는 역사 인식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분명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자발적 기억의 조건 속에서 개인적 경험이 집단적 경험과 접속하는 지점이 있다. 정황이
그러하다면, 「베를린의 유년시절」이 한 개인의 기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벤야민은 그러한 귀결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러한 비판적인 거리두기가 유년기에 대한 기억작업을 착수하게 된 동기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