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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세계
우린 모두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자로 존재하고 있다. 가정, 학교, 사회집단, 국가 등 다양한 각각의 세계들은 일정하게 질서 지워지고 관계 지워진 존재자들의 집합체다. 우린 각자 세계가 부여한 규정성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것이 내가 마땅히 해내야 할 역할이든, 타인들이 바라보는 나의 성격에 대한 어떤 특질이든. 여기서 존재론적 사유는 조금은 다른 질문을 던지려 시도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세계의 바깥에 대해서, 혹은 기존의 세계와는 부딪히는 그 간극이나 틈새에 대해서. 즉, ‘알려지지 않은 자로서의 나’에 대해서. 이 질문의 대상은 굳이 ‘나’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동물로도, 사물로도, 공간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 질문은 미규정적이고 무규정적인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다.
어둠의 존재
어둠은 단순히 빛이나 낮의 짝패도, 그것들에 대한 부정성도 아니다. 빛이 규정성이라면 어둠은 미규정성이나 무규정성이다. 문학과 예술 작품들은 바로 이 어둠과 그늘에 주목한다. 보이는 것과 이해 가능한 것으로서의 빛의 세계를 넘어서 우리의 지평선 바깥에 있는 것들, 또는 틈새들, 기존의 세계와 벌어진 간극들, 어둠들에 눈길을 주는 것이다. 즉, 이미 존재하는 세계 내의 규정성을 가진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며, 또 다른 규정성들로 채워질 수 있는 순수한 가능성들로 남아있는 미규정성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들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세계를 향한 출구를 바라보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불러들이려는 시도다. 때문에, 존재론에서 말하는 ‘여기에 있음을 사유하는 것’은 그저 지금의 물리적 상태에 관한 그저 있음이 아니라, 수많은 규정가능성들과 잠재적인 사건들을 내포한 정치적인 행위다.
예술적 감각의 지평을 넓히기
무엇보다 이 강좌는 존재의 존재를 탐구하기 위해 서양의 예술 작품들과 국내 문학 작품들을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서부터 러시아의 구축주의까지, 말라르메와 랭보의 시는 물론 한강의 『채식주의자』까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예술 작품들을 감상하고 따라 읽어감으로써, 우리는 시야의 확장뿐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좌를 통해 우리의 삶 속으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낮선 존재를 ‘불러들인’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들이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삶을 휘감을 수 있는 강력한 강도와 깊이가 되길 기대해본다.
<상단 왼쪽부터 차례로 아르튀르 랭보, 조셉 콘래드, 에밀리 브론테
이어서 하단 왼쪽부터 차례로, 스테판 말라르메, 랠프 엘리슨, 이탈로 칼비노>
이진경(사회학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근대적 주체의 생산과 관련하여」라는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오랫동안 공부하는 이들의 ‘코뮨’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자본주의 외부의 삶과 사유를 시도하며, 근대성에 대한 비판 연구를 계속해 온 활동적인 사회학자이다. 87년 발표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로 명성을 얻은 후, ‘이진경’이라는 필명으로 ‘탈근대성’과 ‘코뮨주의’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또한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