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개요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웠다. 자연선택, 적자생존, 변이... 생물학 교과서는 진화론을 과학 이론으로만 가르쳤다. 하지만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이 흔든 것은 생물학계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세계관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자연은 무엇인가? 신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질문의 전제가 뒤바뀌었다.
문화사학자 박성관은 "생물학자로서가 아닌, 자연관과 인간관을 바꾼 고전 사상가로서의 다윈"에 주목한다. 이 강의는 진화 메커니즘이 아니라 진화론이 불러온 사유의 혁명을 다룬다. 12강에 걸쳐 다윈의 생애, 『종의 기원』의 핵심, 19세기 문학과 철학에 미친 영향, 게놈프로젝트 이후 현대 진화론까지 종횡무진한다.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 겪어온 삶의 과정이다." 다윈의 이 말이 핵심이다. 창조의 순간이 아니라 변이의 과정, 완성된 설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적응. 이것은 생물학 이론을 넘어 삶을 바라보는 철학이 된다.
창조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진화론을 발표하기까지 다윈이 겪은 인간적 고뇌, 월리스와의 경쟁, 맬서스 『인구론』의 영향, 19세기 역사주의적 세계관과의 접점, 입센의 희곡 속 진화론적 사유, 게놈 혁명 이후 생명의 나무가 다시 그려지는 과정까지. 수유+너머 연구원으로 다년간 다윈을 연구해온 박성관과 함께 진화론의 미래를 엿본다.
■ 강의특징
이 강의의 가장 큰 특징은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라 사상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것이 19세기 유럽인들에게 충격이었는지,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파고든다. 예를 들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이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어떻게 사회진화론으로 왜곡되었는지, 다윈 자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구분해서 본다.
2강에서 다루는 '다윈의 불안'이 인상적이다. 『종의 기원』은 확신에 찬 과학서가 아니다. 다윈은 책 곳곳에서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불임 문제, 눈의 진화, 날개의 기원... 풀리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다윈은 솔직하다. 이 불안과 솔직함이야말로 다윈을 위대한 과학자로 만든 자질이다.
3-8강은 『종의 기원』 핵심 개념들을 천천히 뜯어본다. 자연선택, 변이, 절대적 상관주의, 변화를 수반하는 유래, 생명의 나무, 분포의 수시적 방법 등. 각 개념이 단순히 생물학 용어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임을 보여준다. 특히 7강의 "고래의 진화와 상상력" 부분은 흥미롭다. 다윈이 초판에서 "곰이 물속에서 입을 벌리고 다니다가 고래가 되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가 비난받고 삭제한 에피소드를 통해, 진화론적 상상력의 대담함과 한계를 동시에 본다.
9강 "이야기로서의 진화론"은 이 강의의 백미다. 19세기가 왜 과거에 주목한 시대인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진화론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입센의 희곡들이 어떻게 진화론적 사유를 이야기로 만들어냈는지를 추적한다. 진화론은 과학실험실을 벗어나 문학, 철학, 예술의 언어가 되었다.
11-12강은 현대로 건너온다. 게놈프로젝트, DNA, 이기적 유전자, 신다윈주의, 혹스 유전자, 단속평형설. 다윈 이후 150년간 진화론 자체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준다. 다윈의 생명의 나무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포함하며 다시 그려지고 있다.
■ 추천대상
생물학을 전공했거나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이 강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진화론이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는지, 다윈의 사유가 얼마나 풍부한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 전공자나 철학,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필수적이다. 19세기 이후 서구 사상사를 이해하려면 진화론을 빼놓을 수 없다. 니체의 영원회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모두 어떤 식으로든 진화론적 사유와 대화한다.
환경운동이나 생태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3강의 맬서스 『인구론』 부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환경운동과 박애주의의 기원"을 다루며, 개체군 조절, 자원 한계, 지속가능성 같은 현대 환경 담론의 뿌리를 찾아간다.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유용하다. 과학 이론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사회에 수용되고,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종의 기원』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모든 이들에게. 창조론적 인간관과 진화론적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특별히 설계된 존재인가, 아니면 수십억 년 변이의 산물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기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 수강팁
12강이 각각 다루는 주제가 명확하므로, 순서대로 차근차근 듣는 것이 좋다. 1-2강에서 전체 지형도를 그리고, 3-8강에서 『종의 기원』의 핵심 개념들을 익히고, 9-10강에서 철학적 함의를 사유하고, 11-12강에서 현대 진화론까지 업데이트하는 구조다.
『종의 기원』 원문을 곁에 두고 수강하면 훨씬 좋다. 박성관 강사가 인용하는 다윈의 문장들을 직접 확인하면서 들으면 이해가 깊어진다. 특히 다윈의 문체—주저하고,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나아가는—를 직접 읽어보는 것은 다윈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2강의 "다윈의 황금률" 개념은 전체 강의를 관통하는 열쇠다. "결코 어떤 이론이나 사실이 나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윈의 이 원칙이 『종의 기원』을 가능하게 했다. 이 대목을 특히 주의 깊게 들어두자.
9강 "이야기로서의 진화론" 부분을 듣기 전에, 입센의 희곡 하나쯤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유령』이나 『민중의 적』 같은 작품들. 19세기 문학 속 진화론적 사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체감할 수 있다.
11-12강의 현대 진화론 부분은 용어가 낯설 수 있다. DNA, 게놈, 혹스 유전자, 단속평형설 등. 이 부분은 완벽히 이해하려 하지 말고, 다윈 이후 진화론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큰 그림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자.
여유가 있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나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들을 병행 독서하면 좋다. 신다윈주의와 단속평형설이라는 현대 진화론의 두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마치며
"다윈의 진화론은 마치 기원을 중시하는 사상인 것처럼 악용되어 왔지만, 실은 과정 자체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 핵심에 깔려있다." 박성관 강사의 이 말이 모든 것을 요약한다.
우리는 늘 기원을 묻는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생명은 어디서 왔나, 나는 왜 태어났나. 하지만 다윈은 그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과정이다. 어떻게 변이하고,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시행착오.
이것은 생물학을 넘어 삶의 철학이 된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변이하는 존재다. 완벽한 적응이란 없다. 환경은 계속 바뀌고, 우리는 계속 변해야 한다. 적자생존이란 가장 강한 자의 생존이 아니라, 가장 유연하게 변화하는 자의 생존이다.
다윈 자신도 그랬다. 그의 이론은 출판 후 150년간 계속 변이했다. 멘델의 유전학, 왓슨과 크릭의 DNA,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굴드의 단속평형설. 다윈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다윈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연 질문의 길을 따라 수많은 과학자들이 걸어갔고, 아직도 걷고 있다.
이 강의는 단순히 다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윈과 함께 걷는 것이다.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로, 『종의 기원』의 문장들 사이로, 19세기 문학과 철학의 숲을 지나, 게놈 혁명 이후의 미래까지. 그 산책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박성관(수유+너머 연구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부터 학문자율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연구원으로 활동해 왔다. 찰스 다윈 연구에 매진하여 ‘종의 기원’에 관해 집필 및 강의하였으며, 생물학과 물리, 수학 등으로 관심사를 넓혀왔다. 특히 진화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사이버네틱스 등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아나키한 사상들을 철학하며 수많은 세미나와 강좌를 열었고, 그 불온함을 나누려 애썼다. 2022년 설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지식을 나누다가 2024년 작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