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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암기 과목이라고?!
‘역사는 암기 과목이다.’ 이것은 역사에 관해 가장 널리 공유되는 인식이자, 동시에 가장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인식이다. 연대, 인명, 지명 등 외워야 할 것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외울 것이 많다고 암기 과목이라 한다면, 수학, 영어, 국어 등, 세상에 암기 과목 아닌 것이 없어질 것이다.
‘암기 과목’이라는 말은 왜 부적절한가? ‘암기 과목’이라는 말은 그 학문이 고정 불변의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즉 역사학의 주제들은 과거를 다루고, 과거는 불변의 ‘팩트’이니, 그저 외우기만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역사는 끊임없는 ‘새로 고침’의 역사였다. 과거는 불변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은 시대에 따라 매번 변화한다. 이에 따라 역사도 시대마다 새롭게 쓰인다. 그리하여 과거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되고 해석되고 해석된다. 고로, 역사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더 강력한 창조와 변신과 해석의 학문이다. 이런 역사학을 암기 과목으로 치부하는 건 대단한 오해와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여행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여행이다!’ 왜인가? 역사학은 시간의 흐름 속에 부단히 변화하는 인간의 삶을 고찰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풍광을 접할 기회를 준다. 역사 읽기는 여행, 그중에서도 시간 여행이다. 특히 서양사 읽기는 시간 여행인 동시에 공간 여행이다. 낯선 시간과 공간이기에 여행의 즐거움은 배로 커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저 너머의 삶은 언제나 이국이다. 여행을 즐기다 보면 저절로 견문이 넓어지고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역사 읽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움과 쾌락을 제공해 준다. 우리의 고달픈 일상 속에서 잠깐씩 누리는 여가를 즐겁고 보람차게 지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오락거리이기 때문이다.
나를 깨우는 시간여행
아무리 고되고 힘겹더라도 여행, 그것은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다. 역사 읽기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민낯을 발견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우리의 많은 상식과 편견들이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경험한다. 때로는 껄끄러울 수도,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는 이 경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중한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인습과 단견을 타파하고 보다 열린 사고를 하게 하는 사유의 모험이다.
인간의 현실은 언제나 흙탕물처럼 혼탁하다. 옥석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역사는 그래서 필요하다. 역사 읽기를 통해 우리는 혼돈의 현실 속에서 무엇이 더 영속적이고, 더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기를 수 있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물 위에 떠 있는 거품에 현혹되지 않고 심해의 흐름을 가늠하는 통찰력을 배양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학이 지도자와 엘리트를 위한 학문 -제왕학(帝王學)- 의 핵심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별히 서양사 읽기는 우리 현실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시해준다. 서양이라는 타산지석을 통해 우리 현실의 당면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깨우는 시간여행,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잔해더미에서 현재와 미래를 발견하는 역사 시간여행! 이 흥미진진한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박상익((역사학자, 우석대학교 교수))
청주에서 태어났다.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서양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역사.문학.종교의 학제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인이자 혁명가인 존 밀턴의 대표 산문 《아레오파기티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경희대)를 받았다. 그 후 박사논문에 《아레오파기티카》 완역과 주석을 덧붙여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1999)를 출간했고, 밀턴 탄생 400주년을 맞아 《밀턴 평전: 불굴의 이상주의자》(2008)를 펴냈다. 서양사학자의 시각에서 구약성서를 바라본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2000)를 출간했다.
번역을 통한 한글 콘텐츠 확충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몰이해가 21세기 한국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암울한 전망과 대안을 담은 저서 《번역은 반역인가》(2006)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 《서양문명의 역사 1, 2》(1994),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헬렌 켈러의 신앙고백》(2001),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2001),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2004),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2003)과 《의상철학》(2008),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2011),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