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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철학사인가?
지금까지 저술된 철학사들은 대개 세계철학사가 아니라 일정한 지역적 테두리를 전제한 철학사들이었다. 철학사의 대부분이 ‘서양철학사’이거나 ‘중국철학사’, ‘한국철학사’, ‘일본철학사’, ‘인도철학사’ 등이었던 것이다. 특정한 지역이나 언어권을 다룬 철학사가 대부분이며, 세계철학사는 드물었다. 설령 ‘세계철학사’라는 제목을 달고서 나온 저작이 있다 해도, 그들은 비서구 지역의 철학 전통을 서구 철학사의 한갓 전사(前事) 정도로 배치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철학사’라고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여기, 이정우 교수의 세계 철학사는 역사와 문명의 거대한 흐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입체적이고도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철학사의 역사를 새로 쓰려 한다. 이번 여섯 번째 목적지는 17세기로, ‘표현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출현하는 지점이다.)
17세기, 동서양의 필연적이면서도 우발적인 일치
‘세계철학사 대장정’은 동서양의 지역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흥미로운 일치와 교차의 문양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조우가 역사의 필연적인 전개였는지 아니면 우발적인 일치에 지나지 않는지는 흥미로운 토론의 주제겠지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왕부지와 나란히 놓는 이정우 교수의 새로운 시각은 무엇보다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서구와 동북아 문명의 중세는 모두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에 의해서 지배받았다(스콜라철학과 성리학). 그리고 16~17세기에 이르자 양쪽 모두 이 중세 형이상학을 대신하려 한 유력한 시도를 만나게 된다(데카르트주의, 양명학). 이 두 가지 조류가 매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그 뒤를 이어 출현한 새로운 사유들이 공통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기까지 하다. 이정우 교수는 그 사유를 ‘표현주의’라고 부르며 17세기 유럽과 중국의 사유를 현재적인 것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왜 표현주의인가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연구서에서 가져온 ‘표현주의’라는 이름은 이제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사유를 특징짓는 용어가 된다. 이원론적 사유(데카르트, 주희)에 대한 비판, 지나친 기계론(데카르트)이나 주관주의(불교 및 왕양명)에 대한 반감 등은 물질/신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을 통합할 것을 요청했고, 동시에 이성적 사고의 힘을 믿으면서도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 주체성과 우발성을 법칙에 매몰시키지 않아야 했다. 그 결과 무한한 양태로 표현되는 자기원인(스피노자), 무한히 분석가능한 복수성이 들어있는 내적 연속성(라이프니츠), 일음일양(기)의 움직임(도)이 만들어내는 체용의 전개(왕부지)가 생성의 존재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생성의 존재론은 세계와 사물, 인간을 모두 통합적으로 설명해내는 거대한 체계로 고대와 중세의 뒤를 이어 근대의 형이상학 체계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체계의 출현은 철학사와 사상사를 뒤흔들고 새로운 사유의 대륙을 만들어낸 거대한 지각 변동이었다. ‘내재와 초월’이 중요한 구도를 형성하는 현재의 철학적 지평을 생각하면 이 때 만들어 진 토양 위에서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덧붙이자면 분석철학을 현대의 스콜라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17세기 형이상학의 현재성
이 세 명의 철학자가, 그리고 17세기 표현주의 형이상학의 원전들이 현대의 다양한 철학적 논쟁과 문제에서 자주 소환되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이유를, 이 강좌는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현명한 삶에서 이성과 정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준 현인으로서의 스피노자,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과 가상실재의 시대를 예견한 사이버펑크 철학자 라이프니츠, 반동적인 고대 철학을 계승 극복해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회를 준비한 선지자 왕부지는 모두 그들의 표현주의 형이상학이 만들어낸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강좌를 듣는 분들은 왜 17세기 철학이 ‘현대철학’에 속하는지 납득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철학적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기에 결코 모자라지 않은 철학의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정우(철학자, 경희사이버대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한 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교수, 녹색대학 교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들뢰즈 <리좀 총서>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가로지르며, 철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등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해 왔다.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