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미와 예술의 기준은 달라져 왔다. 어떤 시대에는 결코 예술일 수 없었던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기발한 창조물로 각광받는다. 아서
단토는 현대 미술에 대해 예술을 규정하는 거대 내러티브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창조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예술로서의 진정성이
획득되는 컨템포러리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사실 무엇을 예술이라 볼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많은 담론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미술’이
200년 밖에 되지 않은 근대적 용어라는 점은 다음의 사실을 알려준다. 미술품은 미술 제도 - 책, 비평, 전시, 화랑 등 -
속에서 전시되고 유통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사실 말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는 미술관에 전시됨으로써 ‘샘’이라는 하나의 작품이 되었고,
마트에서 판매하는 세제상표였던 ‘브릴로 상자’는 워홀에 의해 팝 아트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제도와 전시회
예술작품이 단순한 개인의 향유물이 아니라 세상과
접촉하고 타인의 공감을 끌어내어 소통의 매개가 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면, 대중이 미적영감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회는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결정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사회의 이념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표출하는 것이 전시회이다.
그리고 이렇듯 정치, 시대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 전시회의 영향 아래에서 20세기 현대 미술사가 쓰여졌다. 때문에 대표적인 전시회를 살펴보면
미술사 뿐 아니라 현대사의 큰 흐름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전시회들 : 이데올로기의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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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년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이 공개되자 관객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벌어졌다. 정장 입은 남성들 틈에서 나체
여인이 도전적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고상한 것을 추구하던 당시의 보수적인 아카데미 분위기에선 받아들일 수 ‘몸짓’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살롱전에서 탈락하여 낙선한 작품만 모아 놓은 '살롱 데 르퓌제(Salon des Refuses)’에서 전시된 작품이었다. 이
‘낙선전’은 이후 마네를 주축으로 모네, 세잔, 휘가로 등 당대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군집한 인상주의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미술사의 이러한 진보적인 물결은 20세기에 와서 유럽을 중심으로 다다,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등으로 나타났는데, 1936년 런던과
193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전’은 모든 터부를 거부하고 미학적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이들의 이념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장시킨
전시회였다.
2차 대전 이후에는 훌륭한 유럽 작가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이 미술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잭슨 폴락이라는
무명의 작가를 발굴하고 세계에 알린 페기 구겐하임의 소장전이 큰 역할을 했다. 물감을 거칠게 흩뿌리는 그의 ‘액션페인팅’ 기법은 추상표현주의의
시대를 열었고, 폴락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에도 후대 작가들이 이를 차용한 여러 실험적 방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미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한편 60년대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예술에 흡수되는지를 보여준 시대이다. 당시 가시화된 1세대 페미니즘 미술과 68혁명의 저항정신은
그림 뿐 아니라 영화, 음악을 포함한 대중 예술 전반의 흐름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당시의 전시회들은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다양한 스타일과
퍼포먼스를 통해 미학적 급진주의의 물결을 확장시켰다.
전시회는 귀족들만 고가의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었던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미술의 대중화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작가와 관객(혹은 컬렉터), 큐레이터, 화상, 비평가들이 모여있는 미술관은 엄연한 시장이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전시회를 둘러싼 힘의 관계는 대규모 국제전시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2년 마다 개최되는 베니스
비안날레만 하더라도 작품 배후에는 이미 국가적 차원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회는
문화를 선도한다
전시회는 단순히 작품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흡수하고 작품이든 유통방식이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역으로 새로운 정신을 표출함으로써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특히 음악, 영화, 패션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오늘날의 대중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전시회에 가보라. 안목이 있다면 미래의 트렌드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관객은 스스로 문화산업의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현대의 전시회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수동적인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참여자가 되도록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근혜(큐레이터, 아르코미술관 관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큐레이터쉽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다국적 작가들과 작업한 <엘비스 궁중반점>(1999년) 전시를 시작으로 다년간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서울시립미술관 ≪미술관 ‘봄’ 나들이≫(2004) 및 경기도미술관 ≪상상충전≫(2007) 등 현대 미술을 테마로 한 전시들을 주로 기획했다. 영국 레스터대학(University of Leicester)에서 '동아시아 미술관의 글로벌화 전략'에 대한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귀국 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2팀장을 거쳐 현재 아르코미술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