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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
커피 잔이 화장실 벽에 붙어 있질 않나, 미술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뿌려진 모래가 ‘작품’이라고 하질 않나, 꼼짝 않고 바닥에 누워만 있더니 그걸 ‘예술’이라 하고, 음악회에서는 연주자가 연주를 하지... 어떻게 보면 심오하고 진지해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모두 장난 같고 우롱하는 것만 같은, 아, 현대예술! 도대체 왜 이렇게 난해한가!
전복, 반발, 거부, 격퇴, 또는 수용··· 예술의 긴긴 여정
새로운 이론은 앞선 이론을 거부하고 전복시키려는 힘으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거듭되는 사유의 충돌, 거부, 반발, 격퇴, 때로는 앞의 것을 끌어안으면서 나아가는 수용까지. 예술은 전통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다시 그걸 부정하고 싸우면서 발전하여왔다. 진중권 교수의 말을 빌리면 ‘부친 살해의 욕망’을 안고.
예전에는 그 전복의 과정이 길고 지난하였다면, 현대에 올수록 변화는 가파르다. 심지어 옵아트의 경우처럼 3년 만에 그 수명이 다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숨가쁘게 서로 치고받으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현대예술이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 그림은 자연의 ‘거울’이었다. 혹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그때에 우리의 눈은 캔버스의 표면에서 바깥의 자연을 보거나, 혹은 화폭을 뚫고 나가 그 너머에서 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워홀의 작품은 다르다. 그것의 표면은 바깥의 자연을 비추지 않고, 화폭의 뒤에 있는 외부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피상성. 그것이 만들어내는 복제 이미지들의 표면. 그의 세계는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거울은 무엇을 비추는가? “아직까지도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에는 텍스트도 자연의 거울이었다. 혹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그때 우리의 눈은 텍스트의 지면에서 바깥의 자연을 보거나, 혹은 책을 뚫고 나가 그 너머에서 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텍스트는 더 이상 거울의 바깥을 비추지 못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현대는 미디어가 생산하는 복제 이미지들로 만들어진 세계다. 우리는 그 가상의 세계 밖에, 미디어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또 다른 세계, 더 참된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워홀은 이 낡은 인식론적 신념의 불필요성, 나아가 그 믿음의 성립 불가능성을 말한다. 오늘날 실재는 대량으로 복제되는 이미지들 속으로 해체되어 사라지고 있다. - 11강 강의노트 중
현대예술의 흐름, 한 눈에 파악하기
진중권 교수의 <현대예술의 철학>은 현대예술의 흐름을 죽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어떤 원리를 추구했는지, 현대미학의 중요한 두 축인 숭고의 미학과 시뮬라크르 미학을 통해 살펴본다. 현대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를 파악하고 각 예술 사조와 개념의 주요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면 난해하게만 생각했던 현대예술작품에서 각별한 의미와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진중권 교수와 함께 현대예술 탐방에 나서보자
진중권(미학자, 광운대 정보과학교육원 특임교수)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 해석학, 언어철학을 공부하다 1999년 귀국하여, 인터넷과 언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비판 논객’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탁월한 논리, 신랄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글쓰기와 언변으로 유명한 그는 가장 대중적인 ‘논객’인 동시에 뛰어난 ‘미학자’로서 『미학 오디세이 1,2,3』를 비롯, 다수의 미학관련 저서를 집필하였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광운대학교 정보과학교육원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