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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Ⅰ

강좌정보
김진영과 함께 소설을 읽는 것은 즐거움인 동시에 두려움이다. 텍스트의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지나면 그의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사유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책 읽기가 지금 시작된다.

그동안 대중과 함께하는 문학 읽기를 꾸준히 진행해 온 김진영 선생의 또 다른 문학 여정이 시작되었다. 여덟 개의 주제를 놓고 여덟 편의 작품을 읽어 나가는 여정을 함께할 길동무들에게 그가 전하는 프롤로그를 들어보자.


"오랫동안 소설을 읽었다. 그 사이에 소설들은 자꾸만 얼굴을 바꾸었다. 사춘기 시절 소설은 뗏목이었다. 대책 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게 만드는. 젊은 시절 소설은 미지의 여인이었다. 프루스트가 그랬듯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랑해 버린 어떤 여인. 나이 들고 환상 대신 환멸을 배우게 되었어도 소설 읽기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소설도 얼굴 바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때 소설은 카산드라의 운명이었다. 진실을 외치는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고독하고 참담한 예언. 또 어느 때 소설은 고르곤의 눈이었다. 결코 마주 볼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정면으로 응시하는 어떤 시선. 또 어느 때 소설은 화이트 노이즈였다. 사실은 들리지 않는 그러나 달팽이관 속의 무슨 벌레처럼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소리. 또 어느 때 소설은 심지어 신처럼 여겨졌다. 없음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마저 없으면 안 되므로 있어야 하는 어떤 것.

그 사이 더 많이 세월이 지나고 환멸도 더 깊어진 지금 소설은 그러면 또 무엇일까. 두 가지 생각은 분명하다. 소설은 말이 아니라 혀라는 것. 그 혀는 봉인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일단은 여러 번 이어질 소설 읽기 강좌의 이름을 '봉인된 혀들'이라고 작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게 있다. 봉인된 모든 것들은 꿈을 꾼다는 것.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소설들은, 봉인된 혀들은, 도대체 어던 꿈들을 꾸는 걸까."


여덟 편의 소설 속에서 봉인이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필립 로스의『울분』과 함께 청춘의 의미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함께 기다림의 의미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함께 고독을, 가와바다 야스나리의『잠자는 미녀』와 함께 죽음을, 조셉 콘래드의『암흑의 핵심』과 함께 악의 문제를, 가브리엘 마르케스의『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와 함께 폭력의 문제를, 오노레 드 발자크의『사라진느』와 함께 거세의 문제를, 모니카 마론의『슬픈 짐승』과 함께 시간의 문제를 깊이 있게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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