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었다
소크라테스보다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 최초의 철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문헌에 따르면 탈레스를 필두로 형성된 밀레투스 학파가 초기 철학자 집단이었다. 활동했던 지역의 이름을 딴 ‘밀레투스’라는 명칭 외에, 이들은 ‘자연철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놀랍게도 자연 현상을 탐구했던 과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철학은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계에서 영원 불멸한 하나의 원리, 즉 ‘아르케(arche)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이라 할 수 있다.
◈ 물이 만물의 근원이다. - 탈레스
◈ Apeiron(무한정자)이 존재의 근본이다 - 아낙시만드로스
◈ 공기가 모든 것의 실재다. - 아낙시메네스
자연철학자 계보에 속하진 않지만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철학자들도 있었다.
◈ 불이 우주의 궁극적 질료다. - 헤라클레이토스
◈ 숫자가 모든 것의 근본 원리다. - 피타고라스
얼핏 보기에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들의 논변은 사실 충분한 이유를 가진 논리적인 주장이었다. 탈레스가 궁극의 실재가 ‘물’이라고 했던 것은 ‘물’을 질료로 보아 그것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라기 보단, 물을 통해 자연계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해야 옳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아르케라 했던 것도 이를 통해 우주의 불규칙적인 운동을 나타내려던 의도였다. 그리고 피타고라스가 중시한 ‘수’는 엄밀히 말해 ‘숫자’가 아니라 음악이나 천문학, 건축, 기하학 등 일상의 전 영역에서 드러나는 ’수적 비율’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질문이 바로 사유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라는 자연철학자들의 질문은 물리학의 물음과 동질적이다.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그 해답을 여전히 찾아가고 있다.
물리학은 어렵지만 너무나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뉴턴의 제 3법칙이나 운동, 에너지, 전자기, 빛, 열 등과 관련된 물리법칙을 배울 때 고통스러워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은 사유하지 않고 단순히 머리 속에 집어 넣으려 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물리학 공부는 암기가 아니라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는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궁금증을 품어왔던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과 물리학자들이 이에 답하며 겪어 온 시행착오의 과정을 살펴본다면 좀 더 손쉽게 우주의 비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물리학은 고통이 아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하나의 ‘인상’이 될 수 있다. 사실 자연 현상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Q. 우주는 과연 무한할까 ?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이 법칙의 핵심은 에너지의 흐름에는 방향이 있어 ‘엔트로피(무질서도)’가 계속 증가하다가 극점에 도달했을 때 무질서의 수렁 속에서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운동하고 있는 우주는 아직 극점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무한히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된다.
Q.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이론은 여러 가지가 있어왔지만 현재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하나의 점이 대폭발을 통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장됨으로써 우주가 탄생했다’고 설명하는 빅뱅이론이다. 이 이론은 ‘무질서도는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언제나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 2법칙에도 부합된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시공간을 비롯한 우주의 기본 구조와 원소들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우주는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확장 중에 있다.
Q. 타임머신은 가능할까?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선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선택을 돌려놓는다. 덕분에 주인공의 생은 그가 원했던 대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시간 여행이란 타인의 인생까지 마음대로 바꿔 혼란을 일으키는 비윤리적인 수단이 아닌가?
그러나 다중 우주 개념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타임머신을 통해 10년 전의 나로 돌아간다면 이는 진정한 과거의 내가 아니라 다른 시공간에서 살고 있는 ‘자신과 비슷한 어떤 존재’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전에 내가 취한 어떤 결정을 바꾼다 해도, 타임머신을 탔던 현재의 내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우주와, 타임머신을 통해 들어간 우주는 서로 평행하여 결코 만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들이기 때문이다.
만물 이론 [Theory of Everything]
우리는 과학이 종교, 미신에 반하는 ‘완전무결한 학문’이라 믿지만, 물리법칙이란 반론의 증거가 발견되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일종의 가설과 같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에는 ‘암호’, 즉 신뢰할만한 규칙성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나의 법칙이 의도치 않았던 다른 법칙으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을 통해 과학은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본적인 4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을 단일한 수학적 체계로 포섭한 꿈의 이론을 찾고 있다. 통일장 이론이나 초끈 이론 등이 이러한 ‘만물 이론’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 증명되진 않았다. 만물 이론에 대한 열망은 너무도 강하지만, 사실 이는 무척 어려운 작업인데 왜냐하면 중력과 나머지 세가지 힘은 여러 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중력은 결정론적인 ‘상대성 이론’을 따르지만, 나머지 3가지 힘은 미시 영역에 속해 있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따른다. 결정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확률’에 의거한 양자역학에 거부감을 표현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래의 어느 순간 ‘꿈의 이론’이 드디어 밝혀진다면, 모든 것은 그 명료한 형식과 엄격한 수학적 일관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물리학’ 연구가 ‘철학’적 담론 안에서 다루어 진다면, 좀 더 명확하고 신속하게 그 해답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물리학과 철학은 ‘실재’에 관한 동질적인 물음을 통해 세계를 알아가고자 하는 나란한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김재영(물리철학자, KAIST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물리기초론 전공으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론 물리학에서 출발하여 물리철학과 물리학사를 중심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 일반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해 왔으며, 생물철학과 인지과학까지 아우르는 포스트휴먼 연구에 주력하여 인간과 새로운 매체가 상생적으로 만나는 사이버 세상을 기술철학의 눈으로 탐구해 왔다. 과학문화연구센터와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및 이화여대 HK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재직 중이다. 물리철학자로서, 전문적인 과학 지식이 어떻게 다양한 비전공자들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