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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적인 부분이 주도적인 인간은 과두 정체적인 인간이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돈을 추구하는데, 돈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놀고 싶은 욕구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즉, 욕구적인 부분에 속하는 어떤 종류의 욕구들은 억압을 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욕구가 있는데, 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욕구로 나뉜다. 여기서 불필요하다 필요하다는 욕구의 구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욕구적인 부분들이 담고 있는 욕구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런 욕구들을 억압을 한다. 이 사람은 욕구적인 부분이 주도하는 사람이지만, 욕구적인 부분이 주도한다고 얘기해서 욕구적인 부분에 있는 모든 욕구를 다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물론 이성적인 부분이 주도하는 사람이나 기개적인 부분이 주도하는 사람은 욕구적인 부분의 이런저런 욕구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욕구적인 부분이 주도하는 사람조차도 욕구적인 부분의 이러저러한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목이 마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목이 마르지만 마시지 않는 사람 또한 있다고 하자. 이때 목마르다는 것은 욕구적인 부분의 욕구이다. 바로 마실 것에 대한 욕구인 것이다. 마시지 않음에 해당 되는 것은 이성적인 부분의 욕구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목이 마르지만 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이성이 내렸을 경우에, 목마름 이성의 판단과 함께 하는 욕구가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자 하는 욕구, 즉 반대 욕구가 갈증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부분도 그 욕구에 해당하는 욕구들이 다 있고, 기개적인 부분도 그 부분에 해당되는 욕구도 있으며, 욕구적인 부분도 그 부분에 해당되는 욕구들이 다 있는 것이다.
이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애초에 욕구들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 지금 목마르지만 마시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실제로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않았으면 욕구적인 부분의 욕구와 이성적인 부분의 욕구가 서로 대립하는데, 욕구적인 부분의 욕구는 “마셔라” 라는 어떤 명령을 내리게 된다. 반면 이성적인 부분은 “마시지 말아라” 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쪽에서는 마시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시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영혼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갈등 속에서 실제로 마시지 않았다면 이성적인 부분의 욕구가 승리를 것이다.
강성훈(인문학자,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플라톤의 『파이돈』에 대한 연구로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이후 미국 프리스턴 대학에서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와 『국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학술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암학당 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