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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따르던 바그너와 결별하고 사랑했던 살로메와도 헤어지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위기에 처했을 때 철학자는 알프스로 피신을 했다. 살고 싶었다. 그곳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탄생한다. 하나가 둘이 되는 경험을 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라투스트라의 음성을 통해 전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작품 속 인물인 동시에 니체의 철학적 이념을 전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니체는 끊임없이 긍정의 의미와 가치를 구가한다. 그 긍정의 정신을 니체는 디오니소스라 부른다. 그리고 그는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 혹은 디오니소스의 후예라고도 말한다. 결국에는 <디오니소스 송가>를 부르며 광기의 세계로 접어든다. 스스로 신이 된 존재가 되어 비이성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결국 종합하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이고 또 그는 디오니소스가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니체의 삼위일체라고 말하면 어떨까.
태양의 고독을 인식한 철학자, 차라투스트라의 시작
그리고 비극이 시작된다. 비극 작품이 막을 연다. 초인은 태양과 함께 몰락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극은 수수께끼다. 슬픈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낯선 현상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접시가 물병 등에 남겨져 있는 사티로스와 메나데들의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어떻게 생각해내야 할까?
디오니소스 축제의 중심에는 분명 비극 경연대회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경연대회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는데서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면 고대가 남겨놓는 그림들은 이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시작을 알리는 비극의 시작은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풀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허무주의 철학이 말하는 진정한 삶과 죽음
니체는 끊임없이 도덕과 싸운다. 그의 철학은 도덕철학의 한 줄기를 차지한다. 그 도덕의 정점에 진리니 신이니 신의 계명이니 하는 것이 권좌를 틀고 있다. 니체는 삶이 있고 도덕이 있는 것이지 도덕이 있고 삶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누이 주장한다. 이성적 존재는 도덕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이성은 이상을 필요로 한다. 이성을 가졌기에 신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문제다. 이성이 존재하는 한 신은 도덕은 진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알면 간단해지겠지만 모르면 한도 끝도 없이 힘들어지고 만다.
니체 철학 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기의 문제다. 미쳤다! 이 말은 나쁜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게 실정이다. 그것을 한계로 보면 어떨까? 미치고 싶은 미침도 있다. 모든 창조는 일탈과 파괴와 고통을 전제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이런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유혹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유혹자다.이동용(인문학자)
건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에서 「릴케의 작품 속에 나타난 나르시스와 거울」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2015년 9월에는 『한국산문』 제113회 신인수필상 공모에 「오백원」이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니체와 함께 춤을』,『나르시스, 그리고 나르시시즘』, 『바그너의 혁명과 사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