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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창조하는 것처럼, 체제가 인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체제를 창조한다."
-맑스『헤겔법철학비판』中
진정한 휴머니스트,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 국가, 노동!
청년 맑스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다르 영화에 나올 법한, 자유로운 영혼의 댄디한 청년이었을까? 대중과 사회의 진정한 충신이라 할 수 있는 맑스의 청년 시절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의 놀랍고도 가슴 뭉클한 사상과 만날 수 있다.
맑스가 태어난 해인 1818년은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맑스는 이 혁명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대라는 시대, 즉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자신의 이론적, 실천적 전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청년헤겔파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된다. 청년헤겔파는 헤겔의 철학을 자유를 위한 급진적 사유로 해석하던 젊은 지식인들의 모임으로서 젊은 맑스는 이 모임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공부할『헤겔 법철학 비판』역시 청년헤겔파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는 저작이다.
“각 개인들은 이러한 인륜성 아래에서 주관적이고 무규정적인 것, 특수성, 주관성이 규정된 보편성, 객관성으로 이행된 결과이며 인륜성 안에서 특수자들의 이해는 보편자의 이해와 일치, 통일되게 된다."
-헤겔 『법철학』3부, 인륜 中
『헤겔 법철학 비판』, 청년 맑스의 혹독한 헤겔 비판기
우리에게『정신현상학』으로 잘 알려진 헤겔의『법철학』은 맑스 당시, 국가철학으로서 엄청난 공신력을 얻었다. 청년맑스가 ‘청년헤겔파’에서 공부한 것도 헤겔의『법철학』이었다. 어려운 개념어와 함축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을 쓰는 헤겔의 법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헤겔에 의해서 그의 법철학을 이해하는 것보다 맑스의『헤겔법철학비판』을 통해 헤겔이 생각하는 국가와 시민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헤겔, 국가는 정신(가족, 시민사회)의 체현이며, 이것은 군주라는 개별적 신체 속에서 나타난다!
헤겔『법철학』은 국가를 인륜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인륜성이란 국가에 종속된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따르는 법칙 혹은 제도, 규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륜성은 어떤 의무를 부여해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라 하나의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 논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절멸시키고자 하는 적이다.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 작업은 탄핵이다.”
-맑스『헤겔법철학비판』서문 中
헤겔은『법철학』에서 인륜성이 가족-시민사회-국가라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파악한다.
직접적 내지 자연적 인륜적 정신-가족은 그의 통일을 상실하여 분열을 초래하면서 상대적인 입장 즉, 시민사회로 이행한다. 더 나아가 이 결합체는 개별적 구성원의 욕구와 인격 및 소유의 수단으로서 법률체제에 의해서, 그리고 또 이들의 특수이익과 공동이익을 위한 외면적 질서에 따라서 생겨난다. 여기서 외면적 질서는 바로 국가이다. 가족-시민사회는 이렇게 국가체제, 국헌으로 환원되거나 통합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이 정신이라는 관념성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정신의 체현이며, 이 정신의 체현은 군주라는 개별적 인간의 신체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법철학』에 대한 맑스의 혹독한 비판이 시작된다.
맑스, 헤겔의 환상성을 산산조각내다!
“‘국가이성’과 ‘국가의식’은 모든 다른 인격체들을 배제하는 ‘유일한’ 경험적 인격체이다. 그러나 이 인격화된 이성은 ‘내가 의지한다’라는 추상화 이외의 어떤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 짐이 곧 국가로다.”
맑스는 헤겔의 국가이론에서 하나의 전도(revers)를 읽어낸다. 헤겔은 “국가를 인륜성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가족과 시민사회는 국가라는 보편성의 규정을 받는 특수성이 된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논리상”으로는 가족과 시민사회가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그 참된 의미(즉, 이념에 부합되는 것으로서의)의 가족과 시민사회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맑스가 보기에 헤겔의 이러한 논리는 ‘환상(가상)’이다.
맑스는 실제로 국가를 성립시키는 기초는 가족과 시민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가족과 시민사회를 원동력으로서 해서만 국가가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맑스에 따르자면 “정치적 국가는 가족의 자연적 기초와 시민 사회의 인위적 기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국가에 있어 하나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인 것이다.
“그는 ‘특수한 인격체’의 본질이 그의 수염, 그의 피, 그의 추상적 자연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성질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군주란 ‘인격화된 주권’, ‘육신을 갖춘 국가의식’인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인격화된 주권’을 단지 “내가 의지한다(I will)"라는 자의적 의지로 특징짓는다. 곧 헤겔의 정치학은 이념의 자기 전개에 대한 서술, 즉 환상의 서술일 뿐인 것이다. 반면 맑스에게 국가 혹은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자연적 기초’와 ‘시민사회라는 인위적 기초’였다. 그러기 위해서 헤겔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환상을 산산조각 내는 작업이 바로 맑스가 생각하는 비판이었다
소외에서 탈소외로! 민중의 실제적인 힘으로서의 민주주의
맑스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이 주권의 이념성 · 관념성은 단지 하나의 육체만 필요로 하는 것일까? 이제 맑스는 헤겔의 논리를 따라 가더라도 주권이 군주 한 사람에게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수에게 속하는 것이 더욱 타당함을 논증해가고 있다.
인민주권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민주주의다. 하지만 맑스에게서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본질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정치체제는 민중(Demos)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헤겔에게서 정치 체제는 이념의 자기 전개 과정의 산물로, 즉 이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나타나고, 개인들은 이 이념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자들로 이해되지만, 맑스는 바로 이 개인들, 민중들이 정치적 체제를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인민주권론을 옹호하는 것은 바로 이들 민중들이야 말로 모든 정치체제를 만들어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소외에서 탈소외로! 그리고 바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실체적 힘으로서 민중들이 주권의 담지자가 되는 것을 체제로서 확증하는 정체가 바로 인민주권의 국가형태, 민주정이다.
『경제학-철학 초고』, 열심히 노동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경제학-철학 초고』는 말 그대로 초고이다. 맑스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의 저서로부터 인용한 맑스의 1844년 발췌문, 즉『경제학-철학 초고』를 출판하게 된다.
『경제학-철학 초고』는 서구 맑시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초고 담고 있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성찰이나, 인간적 본질 회복에 대한 주장은 소련 현실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는 독특한 사조를 만들어냈다.
헤겔 vs 맑스의 노동: 노동의 정신의 완성? 노동은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맑스는『경제학-철학 초고』를 당시 국민경제학자들의 잘못된 가정을 비판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사적 소유를 당연하게, 혹은 중립적인 실체로 가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맑스는 노동을 분석한다. 맑스는 국민경제학이 ‘노동’이라는 부의 본질적인 근원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현재 노동이 소외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헤겔의 노동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면서 맑스의 논지가 전개된다. 헤겔은 역사 자체를 정신의 여행과정으로 파악한다. 유명한 변증법은 그 여행과정의 메커니즘이다.
인간의 본질이 외화되고 대상화되는 과정이 바로 노동이다. 이런 외화 대상화는 절대정신이 완성되는 자기 복귀의 과정이다. 노동을 통해 역사가 펼쳐지고 이성의 실현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그러므로 헤겔은 노동을 정신 활동 일반으로 확장해서 이해하며, 긍정적인 것으로 서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은 정신의 펼쳐짐이며, 정신 완성 · 발전의 과정이다.
그러나 뢰비트가 지적하듯 헤겔의 노동은 ‘비역사적’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설사 정신이나 인간이 그러한 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업 발전 같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 노동을 특정한 형태로 정향하고 인간이 노동을 소극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만듦을 봐야 한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이 이루어지는 대상화가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외화 혹은 대상화가 독립적인 힘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한다. ‘소외’란 바로 이런 현상을 나타낸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인간에게 대립하는 셈이다. 노동이 만들어내는 몇 가지 역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자는 열심히 노동을 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상품을 더 많이 창조할수록, 스스로가 상품이 된다. 그것도 값싼 상품으로 말이다.
'소나타'를 만든다고 '소나타'를 주는가?
맑스 시기의 노동자가 그러했고, 최근의 비정규직이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시간은 누구보다 길지만, 절대빈곤에 가장 많이 노출된 것도 비정규직이다.
여기서 국민경제학은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의 문제가 던져진다. 부가 노동에서 출발한다면 왜 노동자는 계속 가난해지는 걸까? 맑스는 그것이 소외된 노동과 소외된 노동이 만들어내는 ‘사적 소유’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본질적인 요인인 소외된 노동을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산출해도, 그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현대 자동차 노동자가 자동차 대리점에 가서 ‘소나타’를 달라고 해도 주시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소나타’를 만들어도 그 ‘소나타’가 나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소외된 노동에서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자본가의 사적 소유를 보장 할 뿐이다.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사실 ‘노동’으로 오히려 자기 활동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로 인해 노동하면 피곤하고 지치며, 행복은 노동 바깥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노동자의 모습에서 이를 볼 수 있다. 하루 10시간은 고통 받고, 4시간 정도 안식을 찾고 나머지는 밥 먹고 자는 형태이다.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인간은 특별한 보편적 힘을 가지는데, 그것은 자신이 포함한 전 자연을 의식적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종의 입장에서 생산할 수도 있고, 자신이 포함된 자연 전체를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만든다. 동물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자연을 직접적인 생활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할 시도도 못한 채 노동하게 된다. 무목적적 노동,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진짜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소외된 노동은 인간간의 관계도 규정한다.
이 말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와 그 상품을 소유하는 자본가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소외된 노동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대립하게 된다.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향유가 되기 때문이다.
맑스, 소유란 대상을 만나는 극히 결핍된 방식이다!
맑스는 저열한 형태의 공산주의를 넘어 진정한 공산주의를 달성할 것을 주장한다.
“사유재산이 우리를 우둔하고 너무나 일면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대상을 가질 때, (…) 먹고 마시고 우리 몸에 걸치고 그 안에서 거주할 때 등, 간단히 말해서 대상을 사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 그런 까닭에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 대신에 모든 이러한 감각들의 단순한 소외, 소유의 감각이 등장하였다”
-맑스『경제-철학 초고』中
즉 맑스에게 소유란 대상을 만나는 극히 결핍된 방식이다. 조야한 감각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마치 굶주린 인간에게는 음식의 인간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고 음식으로서 그 추상적 현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유란 극히 제한적이고 빈곤한 형태의 생활을 의미한다. 사적소유가 보증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사적소유란, 그것을 처분할 수 있을 때 있다고 확증할 수 있다. 즉 사적 소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처분권인 셈이다. 문제를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대상과 만드는 것처럼 빈곤한 것도 없을 것이다.
진정한 꼬뮨이란 현재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감각의 인간성 역시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이를 맑스는 ‘감각의 인간성도 감각의 대상의 현존을 통해서, 인간화된 자연을 통해서 생성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유와 달리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지닌 풍부한 인간을 뜻한다. 사회주의는 이렇게 풍요로운 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적극적인 인간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사적소유의 극복과 인간의 회복은 바로 이 같은 자유로운 활동의 가능성을 회복하자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현재 싸움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참고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투쟁에서 보통 정규직화를 이야기한다. 매우 중요한 요구이지만, 그것만을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맑스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소외된 상태에서의 욕구 분출이기 때문이다. 즉 꼬뮨주의 운동 혹은 혁명운동은 현존하는 이해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다. 오히려 지금과 다른 이해와 삶의 방식을 창안해야 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경제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저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고 거기서 혁명의식이 생길 것이라는 태도는 비현실적이며 기회주의적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운동을 해야 한다. 지금 당면한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 변화의 관점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바로 전통적 맑스주의라고 덧붙인다.
정정훈(수유+너머 연구원)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을 졸업했으며, 학문자율공동체 <수유+너머> 연구원으로 저서 집필 및 연구와 강연활동을 해왔다.
주된 관심사는 코뮨주의 정치철학과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이론적 해석이다.
저서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불온한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