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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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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개요
분필을 내려놓고 호미를 든 철학자 윤구병 교수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펼친 존재론 강의다. 15년간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변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직전, 서울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이 강좌는 그리스 철학과 베르그송의 시간론을 토대로 '있음과 없음'의 존재론에서 '함과 됨'의 윤리론까지 탐구한다.
강의는 '있는 것이 있다', '없는 것이 없다'라는 언뜻 단순해 보이는 명제들이 어떻게 '하나가 있다', '다 있다'는 의미로 전환되는지 분석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공동체 형성 과정, 도시사회의 출현과 문자의 발달, 그리고 '함'과 '됨'이라는 행위의 두 양태를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파헤친다. 철학 전문지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며,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보리)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된 바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독창적 해석, 오행사상과 우리말의 철학적 가능성, 그리고 스탠퍼드 감옥 실험 같은 현대 사회심리학 실험까지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 강의는 사변적 철학이 아닌 '삶 속의 철학'을 추구한 윤구병 교수의 사상적 뿌리를 보여준다.
■ 강의특징
이 강의의 가장 큰 특징은 추상적인 철학 개념을 우리말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있다/없다', '함/됨', '이다/아니다' 같은 일상어가 품고 있는 철학적 함의를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서양 철학의 존재론을 우리 언어 체계 안에서 재구성한다. 서양 철학 용어를 그대로 번역하는 대신, 우리말의 구조와 논리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청중과의 활발한 상호작용도 주목할 만하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학생들의 질문과 반응을 받아들이며 논의를 심화시키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수수께끼'라는 표현을 쓰며 청중의 사유를 자극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대화적 방식은 딱딱할 수 있는 존재론 강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비교를 통해 공동체 윤리의 근원을 탐구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시간 중심의 농경문화와 공간 중심의 유목문화가 어떻게 다른 지혜 체계와 사회 구조를 만들어냈는지 설명하면서, 현대 도시사회의 문제점까지 연결 짓는다. 단군신화를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만남으로 해석하는 대목은 기존의 신화 해석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베르그송의 시간론과 생명철학이 강의 전반에 깔려 있다. 생명의 자율성, 창조적 진화, 지속의 개념 등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함과 됨'의 논의와 맞물리면서 존재론적 깊이를 더한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개념 등 과학적 개념도 동원되어 철학적 논의를 뒷받침한다.
■ 추천대상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보다는 기본적인 철학 개념에 익숙한 학습자에게 적합하다. '있음과 없음', '동일성과 차이' 같은 존재론의 기초 개념을 다루지만, 논의의 전개 방식이 상당히 압축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철학 입문 과정을 이수했거나 철학서를 몇 권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강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서양 철학의 한국적 토착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우리말 문법 구조로 재해석하고, 단군신화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시도는 철학의 문화적 번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또한 언어철학이나 의미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말 동사와 형용사의 철학적 함의를 분석하는 부분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실천적 삶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을 찾는 이들에게도 의미 있다. 윤구병 교수는 이 강의 직후 대학을 떠나 변산공동체를 설립했고, 2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며 대안교육을 실천해왔다. 그의 존재론은 단순한 이론 체계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물음과 직결되어 있으며, 이런 배경을 알고 들으면 강의가 더 깊이 다가온다.
베르그송 철학에 관심 있는 학습자에게도 좋은 입문이 된다. 『창조적 진화』의 핵심 개념들이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설명되며, 생명철학이 현대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지 보여준다.
■ 수강팁
첫 3강까지는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들어야 한다. '있음과 없음', '좋음과 나쁨'에 대한 논의가 강의 전체의 기초가 되므로,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면 후반부 내용을 따라가기 어렵다. 특히 '있는 것이 있다'가 왜 '하나가 있다'는 의미인지, '없는 것이 없다'가 왜 '다 있다'는 뜻인지 설명하는 대목은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것이 좋다.
강의를 들으면서 메모를 적극 활용하자. 윤구병 교수의 설명 방식은 선형적이지 않고 나선형으로 같은 주제를 반복하며 심화시키는 방식이라, 앞에서 나온 개념들이 뒤에서 다시 등장한다. 핵심 개념과 그 관계를 도식화하면서 들으면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5강과 6강의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 비교 부분은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통찰이 풍부하다. 만약 앞부분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 부분부터 먼저 듣고, 윤구병 교수의 사유 방식에 익숙해진 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윤구병 교수의 책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을 함께 읽으면 좋다. 강의에는 없는 내용이 책에 있고, 책에는 없는 내용이 강의에 있어서 서로 보완적이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읽어봤다면 더욱 좋지만, 필수는 아니다. 강의 중에 베르그송의 핵심 개념들이 충분히 설명되기 때문이다.
청중과의 질의응답 부분도 놓치지 말자.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개념이 더 명확해지고 구체적인 예시가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질문이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과정 자체가 철학적 사유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 수강후기에서
많은 수강생들이 '어려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강의'라고 평가한다. 내용 자체는 결코 쉽지 않지만, 윤구병 교수의 조곤조곤한 설명과 구수한 입담이 추상적인 개념을 조금은 친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면 다시 되돌려서 들어야 하는 굉장한 논리력을 요하는 강의'라는 평가도 있다.
'있음과 없음' 부분은 대부분의 수강생이 어려워하는 반면, 단군신화 해석이나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 비교 부분은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단군신화를 곰과 호랑이의 대결이 아니라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만남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참신했다는 평가다.
청중과 상호작용하는 강의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수강생은 이런 방식이 강의에 활력을 준다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수강생은 차라리 윤구병 교수의 일방적 강의가 더 알차지 않았을까 아쉬워하기도 한다. 질문의 수준이나 방향에 따라 강의가 영향을 받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천과 분리되어 있지 않는 교수님의 존재론, 삶의 철학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는 후기처럼, 윤구병 교수의 삶 자체가 강의에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지적도 있다. 존재론을 강의한 뒤 실제로 대학을 떠나 농부가 된 행보는 '함과 됨'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성경이나 신화를 다루는 부분에서 좀 더 정확한 지식이 필요했다는 비판적 의견도 있다.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이나 안식교에 대한 언급 등에서 사실 관계의 오류가 지적되기도 했다. 철학적 논의의 예시로 사용하더라도 최소한의 정확성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마치며
이 강의는 한국 철학계에서 드물게 우리말로 존재론을 전개한 시도다. 서양 철학 개념을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 언어의 구조 자체에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발굴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있다/없다', '함/됨'이라는 일상어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철학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윤구병 교수의 철학은 책상머리 철학이 아니다. 그의 존재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물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로 그는 이 강의 후 교수직을 정리하고 변산으로 내려가 2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교육을 실천해왔다. '함과 됨'의 철학은 단순한 이론 체계가 아니라 삶의 양태에 대한 성찰이며, 어떤 행위의 주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선택의 문제다.
12강에 걸친 이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추상적이고 압축적인 논의가 계속되며, 집중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으면, 철학이 단순히 과거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사유하는 도구임을 깨닫게 된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를 향한 윤구병 교수의 바람은, 존재론이 곧 사회비판이며 실천의 철학임을 보여준다.
분필을 놓고 호미를 든 철학자의 마지막 강의. 그 목소리에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 사유와 실천이 하나 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윤구병(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