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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탄생은 사이렌의 노래였다!
안개 속에서 환상적인 노래로 배들을 유혹하여 가라앉힌다는 ‘사이렌의 노래’는 사실 소설의 탄생 배경이 된다. 호머(Homeros)의「오디세이아Odysseia」와 카프카의 단편「사이렌의 침묵Das schweigen der sirenen」에 나타난 ‘사이렌의 노래’를 통과한 두 소설 속의 주인공 ‘오디세이’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은 ‘예술의 종말’과 ‘탄생’이라는 대립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일명 ‘호머 버전’과 ‘카프카 버전’의 ‘사이렌의 노래’가 그것. 이제 소설 속으로의 행복하고도 복잡한 미로 게임에 참여해보자.
호머 VS 카프카
인류 최초의 서서문학인 호머의「오디세이아」에 대한 아도르노의 ‘이성적 해석’과 호머의 ‘사이렌의 에피소데’를 변주한 카프카의「사이렌의 침묵」에 대한 블랑쇼의 ‘자연과 인간의 이중적 언어’에 대한 해석은 단순히 철학적이고 역사학적인 해석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도르노의 ‘이성적 해석’ 방법을 ‘호머 버전’에 도입한 것은 호머의 네거티브 버전에 담긴 사이렌의 노래 가사 때문이었고, ‘카프카 버전’에 대한 블랑쇼의 해석은 카프카가 묘사한 오디세이아의 행동 때문이었다.
오디세이아는 사이렌을 통과했다!
어떻게?
호머 버전: 사이렌의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네가 내 노래를 듣게 되면 너는 더 많은 것을 알고 행복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사이렌의 이러한 유혹에 ‘호머 버전’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몸을 묶고 귀를 열고는 무사히 통과하게 된다.
카프카 버전: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묶”게 함으로써 ‘사이렌의 노래’를 무사히 통과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카프카는 오디세우스가 귀를 틀어막았기 때문에 사이렌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 아니라, 사이렌이 아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사이렌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디세우스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는 것이다.
왜?
호머 버전: 오디세우스는 귀를 막지 않고 몸을 묶었을까? 우리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이렌의 노래는 천상의, 자연의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성을 잃고 자연으로 뛰어 들고픈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에 사이렌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내 노래를 들으면 너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바로 이 구절, 즉 고향이라는 단어에서 신화적 존재이면서 자연 그 자체인 사이렌이 말하는 고향은 오디세우스가 생각하는 고향하고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디세우스가 생각하는 고향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과 자신 땅과 사유재산이 있는 안정되고 여유로운 곳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지향하는 이성적인, 더 나아가 물질적인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렌이 데려다 주겠다는 대지의 자연, 낙원의 자연에 오디세우스는 몸을 묶는 것이다. 그곳은 갈 수 없는 곳, 그리고 꼭 가고 싶지는 않는 곳이라는 것이다. 반면 사이렌의 노래는 지상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귀를 열어 놓는 것이다.
카프카 버전: 오디세우스는 왜 귀를 막은 척 한 것일까? 사이렌의 노래는 무엇이든 다 뚫고 들어가고 무엇이든지 다 깨뜨려버리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를 묶고 그랬다고 해서 호머버전에서처럼 그냥 통과할 수는 없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카프카 버전’의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보다 무서운 ‘사이렌의 침묵’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의 ‘가짜’ 예술의 탄생 vs 블랑쇼의 상상적 노래
아도르노는 호머의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를 통과한 것을 기점으로 진짜 예술(사이렌의 노래)는 죽었고 대신 가짜 예술(오디세우스의 이성의 승리)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합리성이 자연의 본래적 예술성을 저버리고 예술은 이제 가상의 것으로 변모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블랑쇼는 카프카의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를 통과한 것을 상상적인 노래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즉, 소설의 상상적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다. 두 사상가의 입장은 상반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무엇인가의 ‘탄생’이라는 같은 결론이 나왔다. 아도르노가 비록 ‘가짜 예술’이라고는 했지만, 인간적인 예술, 문명화된 예술이 태어난 것이다.
화이트 노이즈란 무엇인가?
화이트 노이즈는 실제로 내용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들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의 화이트노이즈는 무엇일까? 바로 ‘건너가기’이다. 카프카나 블랑쇼가 말하는 ‘상상적인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멀리서 들려오지만 사이렌의 침묵처럼 가까이 있는 바로 그것. 듣지 않으려 해도 내면에 조용히,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도 확고하게 들려오는 소리. 소설 속의 어떤 텍스트가 자꾸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작가의 의도나 장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그 텍스트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새롭게 읽기 혹은 새롭게 쓰기. 그것이 바로 소설속의 화이트 노이즈이다.
김진영(인문학자, 철학아카데미 대표)
고려대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University of Freiburg)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미학을 전공하였다. 바르트, 카프카, 푸르스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을 넘나들며, 문학과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수강생들로부터 ‘생각을 바꿔주는 강의’, '인문학을 통해 수강생과 호흡하고 감동을 이끌어 내는 현장', ‘재미있는 인문학의 정수’라 극찬 받았다. 또한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독서 강좌로도 지속적인 호평을 받았다. 현재 홍익대, 중앙대, 서울예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사)철학아카데미의 대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