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추상이라는 가상 세계
추상회화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본다. 홍승혜는 컴퓨터 환경에 기반을 둔 ‘픽셀 단위의 기하 도형’을 조형의 기본으로 삼고, 이를 변환·변주·복제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조형질서로 환원시키는 포스트-미니멀 회화의 게임을 전개한다. 줄리 머레투는 도시 공간이나 건축 도면에서 차용한 각종 기호와 추상적 모티브를 일종의 회오리바람처럼 다층적인 겹구조를 만들어 개념적 역동성이 드러나는 추상회화를 제작한다. 성낙희는 장식적인 프리핸드 형태의 색형들이 무한증식하는 추상적 조형의 세계를 실험한다. 이소정은 수묵화의 변형을 통해 ‘준자율적으로 성장하는 유기적 추상/반추상’의 당대적 추상 실험의 열린 질문에 동참하고 있다.
본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다양한 장치를 통해 인간의 시각적 인지 능력과 그 과정에 변화를 주는 작품을 살펴본다. 제임스 터렐은 유사-종교인의 태도로 ‘숭고의 미’를 당대적으로 유의미한 형식으로 실행하는 작가로, 그의 작품은 전시 공간에 빛의 기하학적 도형을 만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공간 감각이 점차 변화하도록 한다. 올라푸어 엘리아손은 마치 과학자처럼 몇몇 가설을 세워, 각종 기계 장치를 만들고 이를 정해진 공간에 실험하는데, 그가 작품의 소재로 삼는 것은 대자연의 광학적 경이이다. 최병일은 광학적 기계 장치들을 통해 기억과 이미지, 언어의 경계면을 탐구한다. 그의 작업은 관람객에게 광학적 시선의 존재를 경험하게 하고, 그 의미를 묻는다.
애욕의 풍경
현대미술에 나타난 성적 판타지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헨리 다저는 자신만의 비현실 세계를 만들어, 수백여 장의 아름다운 수채화 연작과 길고 긴 원고를 작성했다. 그의 작업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성적 존재는 그가 구축한 복잡다단한 전쟁의 세계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추상화가 사이 톰블리는, 알레고리나 추상화된 이미지 혹은 상징을 이용해 자신의 캔버스에 노골적으로 성욕을 표현했다. 매튜 바니는 ‘크리매스터’ 5부작을 통해, 호모에로틱한 페티시즘과 캠프의 문법으로 남성 상징의 괴세계를 보여준다. 한국의 젊은 작가 이은실은 성적 환상의 세계로 재구성된 동양화를 통해 여성의 성적 쾌락이 펼쳐지는 멜랑콜리한 무릉도원을 펼쳐 보인다.
싸움의 기술
작가의 성적·인종적 정체성은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쟁점으로 부각되며, 그때 미적 혹은 정치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양차대전 사이의 유럽적 가치관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미국이 선호하는 작가로 각광받게 된 프랑스 대표 작가인 장 뒤뷔페의 작품에 나타난 ‘타자성’의 성격을 살펴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을 통해 흑인 미술의 전통과 흐름을 살피고, 그들의 작품에 나타난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그 양상을 파악한다. 중국인 현대미술가 차이궈창은 화약을 터뜨려 동양화를 그리는 작업으로 폭발하는 ‘중국성’을 제시한다. 자칭 ‘아시안 펑크 보이’인 테렌스 고는 동성애자 하위문화와 오리엔탈리즘을 토대로, 백인 중심 예술계의 빈틈을 활용한다.
이 강좌는 전후의 거장에서 21세기 신예까지, 현대미술이 거둔 성취를 살피며 그 기본 문법의 형성과 전개를 공부하는 자리다. 임근준은 '오늘의 미술'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라 말하며, "자율성을 추구하는 작가가 보이는 세계에 이리저리 개입함으로써 얻은 사유의 어떤 물질적/비물질적 계정이 미술 작품으로 귀결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시대와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어떤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결여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의 미술'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는 이 강좌에서 소개하는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성찰하게 될 것이다.
임근준(미술•디자인 평론가)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뒤, 미술이론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미술교육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지냈으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미술•디자인 평론가이자 DT네트워크 발기인, 홍익대 BK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립대와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 및 디자인사를 주제로 활발히 강연 중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 한국사회에 작은 변화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