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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그야말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문학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란 무엇인가’ 시리즈는 단순히 문학에서만 즐겨 쓰는 제목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무엇’에 대해 묻는 책들은 그 분야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어려운 명제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영화에 대한 고집스러운 주장과 함께 다양한 다른 범주의 학문들과 비교한다. 영화학에서는 철학과 문학을, 문학에서는 영화와 철학 혹은 음악론을, 철학에서는 인생과 학문 그리고 우주 등 이 세계의 총체적인 것들을 논한다.
웰렉(Wellec)『문학의 이론Theory of Literature』이란 책을 보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문학이라는 말을 쓸 때, 이때의 ‘문학’은 예술이다. 예술에 대해서는 배울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성질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예술성이랄지 문학성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We must first make distinction between literature and the literatured studies." 우리가 먼저 구별해야 되는 게 있는데, 문학을 예술로 보느냐하는 것과, 예술에 대한 스터디로 보느냐하는 두 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논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술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학문이 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다고 문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법칙은 어떤 법칙이라도 70%만 커버되면 법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문학도 예를 들어 국문학, 영문학처럼 하나의 학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엔 100% 커버되는 법칙은 없지만 문학은 그 ‘70%의 법칙적용’에 있어서 난감한 점이 많다.
이즈음에서 사회과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이 위대한 것은 두 가지가 큰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제는 바로 총체성이다. totality, 즉 전체성을 학문의 대전제로 깔려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관 · 객관의 동일성이다. 황지우 시집처럼 ‘나는 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 어렵고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한 크레타 인이 말했다.’ 이 진술의 진위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말하자면 진짜 타자가 누구냐? 하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이 두 전제가 맞물려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는 구분 짓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학문으로서 단정 지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는『사르트르의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를 사르트르 세기라고 말한다. 20세기라는 말도 필요 없이, 사르트르 한 사람 안에 20세기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사르트르라는 사람은 헤겔 흉내를 내려고 하다가 흉내도 못 내고 죽었다 하는 사람이다’라는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는 헤겔 흉내를 내려다 안 되서 죽었고 헤겔 손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지금껏 하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는『부정의 변증법』에서 거의 대부분이 헤겔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아도르노 또한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코제브라는 사람은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위신을 위한 투쟁, 즉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해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피라미드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설계도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데, 바로 설계도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이 순간부터 이미 노예가 아닌 것이 된다. 즉, 주인이 아니고는 설계도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노예는 일함으로써 주인이 되어 버리고, 노예가 설계도를 만듦으로써 주인은 타락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코제브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는『헤밍웨이론』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평론을 썼다. 그 주된 내용이 ‘왜『노인과 바다』라는 손바닥만 한 작품을 가지고 노벨상을 주고, 미국 사람들이 헤밍웨이를 그렇게 존경했느냐?’에 대한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이다. 바타유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를 이용해 『노인과 바다』를 해석한다. 주인이 영감이고 물고기는 주인과 대등한 상대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양의 활동사진이나 서양의 소설에서 군주들이 사냥을 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성주나 이런 사람들은 대 영지를 갖고 있고, 숲은 만들어 놓고 그러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냥개를 많이 키워 사냥하러 나간다. 그런 것들은 군주들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왕이나 대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일대일로 ‘네가 실력이 있냐? 겨뤄보자!’ 해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고, 상대방이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죽은 사람은 이제 노예가 된 것이고, 자연히 ‘나’라는 사람은 허전하고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는 사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냥이라고 하는 대응행위를 통해서 본인이 대등한 사람하고 일대일로 싸우는 것으로 자기 충족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 유풍은 그대로 남아, 군주가 아니면서도 자신이 군주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사냥이라는 놀이가 전수된다.
노인은 군주다. 군주가 지금 대결하고 있는 것은 자기와 실력이 같은 대상이어야 하고, 이 허약한 노인이 그 큰 물고기를 잡아서 손이 다 터지고 피가 나는 대도 상어를 단순히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에게 상어는 힘과 실력이 자신과 비슷한 내 친구지 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는 노인은 상어에게 뜯어 먹힌다. 이렇듯, 바타유는『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이 단순히 ‘노인’이 아니라, 미국을 상징하는 주인의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사와 문학이론 연구, 작가론, 작품론을 위시한 실제 비평, 예술론, 에세이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거대한 학문적, 문학적 성과를 이룩한 독보적인 문학사가이자 문학평론가이다.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문학 관력 서적을 출간하였으며, 한국문학작가상(1987), 제1회 대한민국문학상(1987), 제1회 김환태문학평론상(1989), 제2회 팔봉비평문학상(1991), 제3회 평운문학상(1993), 제11회 요산문학상(1994), 황조근정훈장(2001), 제10회 대산문학상(2002), 제7회 만해상(2003), 제20회 수당상 인문사회부문(2011년)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일본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75년부터 200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교환교수(1978년)와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1980년),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1987년)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명지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여전히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