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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알 수 없는 이
평생 어떠한 공적 활동에도 나서지 않고 고독한 읽기와 쓰기만을 지속한 은둔자, 모리스 블랑쇼. 이러한 삶은 그의 문학관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었으며, 문학은 언어를 통한 에고의 해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실존이 아닌 현존, 무언어와 무아의 세계인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중성적이고 무심한 텍스트를 읽고 또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문학관이 보여준 독존적인 세계는 많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으로서 큰 영향을 주었다.
공모적 우정의 기록
『우정』은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을 잇는, 문학비평 모음집이다. 이것은 그의 ‘공모적 우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블랑쇼가 바타유로부터 가져온 ‘공모적 우정’은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으로, 상대가 절대적인 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바타유, 말로, 뒤라스, 카뮈, 고르츠, 카프카 등 그가 우정과 존경을 바치는 작가들을 통해 블랑쇼는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원자폭탄의 시대까지 폭넓은 관심사를 다룬다. 그렇지만 그 다양한 여정은 근원적인 무심함으로, 한계의 위반과 문학의 역할로, 글쓰기의 의미로 돌아온다.
우정의 블랑쇼 읽기를 위하여
블랑쇼는 우리 시대의 작가일까. 일상과 소비와 쾌락과 억압이 모든 걸 집어삼킨 이 시대에 에고의 허상을 거부하며 바깥의 사유를 성찰했던 블랑쇼는 무슨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블랑쇼는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도 자신을 지우는 것이 가능한, 역설적인 깊은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자신을 잃을 정도로 많은 것에 중독되지만 그만큼 에고에 대한 집착이 깊어지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해독제는 아닐까. 우리를 긴장시키는 낯선 우정의 대화를 통해 잃어버린 사유의 지평을 함께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역자인 류재화 선생의 친절한 안내를 통해 대화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류재화(번역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강사)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누벨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프랑스 문학 및 역사와 문화, 번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달의 이면』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보다 듣다 읽다』,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 『기자 생리학』, 모리스 블랑쇼의 『우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