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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개요
평생 은둔하며 고독한 읽기와 쓰기만을 지속했던 모리스 블랑쇼. 그에게 문학은 언어를 통한 에고의 해체였고, 인간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우정』은 그가 바타유로부터 빌려온 '공모적 우정'의 대화를 기록한 문학비평 모음집이다. 여기서 공모적 우정이란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으로, 상대를 절대적인 타자로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만남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블랑쇼는 바타유, 앙드레 말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카프카 등 20세기 프랑스 문학사를 관통하는 작가들을 다룬다. 라스코 동굴 벽화부터 원자폭탄의 시대까지, 그의 관심사는 폭넓지만 결국 근원적인 무심함과 한계의 위반, 문학의 역할과 글쓰기의 의미로 수렴된다. 이 강의는 블랑쇼의 『우정』을 역자인 류재화 선생이 직접 해설하며, 그의 난해한 문학 세계로 안내하는 여정이다.
■ 강의특징
이 강의의 가장 큰 특징은 번역자가 직접 원문을 해설한다는 점이다. 블랑쇼의 중성적이고 무심한 문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다. 역자 류재화 선생은 블랑쇼의 문체가 왜 그토록 비인칭적이고 몰개성적인지, 그것이 에고 해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1강부터 세심하게 풀어낸다.
강의는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으로 시작한다. 블랑쇼에게 번역은 원본을 종속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도래하는 글쓰기'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어서 바타유의 라스코 동굴 해석을 통해 예술의 탄생을 논하고,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통해 박물관이 예술의 새로운 장소가 되는 과정을 탐색한다. 뒤라스의 소설에서는 언어의 낭비를 통한 에고 삭제를, 카뮈의 『이방인』에서는 사물화된 정직함을, 카프카에서는 1인칭에서 3인칭으로의 도약을 발견한다.
각 강의는 평균 120분이 넘는 긴 호흡으로 진행되며, 단순한 작가 소개를 넘어 라캉의 상징계·실재계·상징계, 랭보의 '나는 타자다', 하시디즘과 글쓰기의 광기 등 철학적·정신분석적 개념들을 종횡무진 오간다. 20세기 프랑스 문학사를 블랑쇼라는 렌즈를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 추천대상
이 강의는 난이도가 높다. 블랑쇼 자체가 난해한 사상가인 데다, 그가 다루는 작가들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바타유, 카뮈, 카프카 등의 작품을 어느 정도 접해본 이들에게 추천한다. 프랑스 현대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다면 더욱 좋다.
하지만 꼭 전문가만을 위한 강의는 아니다. 현대 사회의 관계 맺기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은 이, 소비와 쾌락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도 의미가 있다. 요즘 우리는 SNS를 통해 수많은 '친구'를 만들지만, 정작 상대를 절대적 타자로 존중하는 진정한 만남은 드물다. 블랑쇼의 공모적 우정은 이런 시대에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블랑쇼에게 글쓰기는 자기 표현이 아니라 자아 해체의 수단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우기 위해 쓴다는 역설적 사유는 창작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 수강팁
강의를 듣기 전에 『우정』(모리스 블랑쇼, 류재화 역, 그린비, 2022)을 미리 읽어보기를 권한다. 원문을 읽지 않고 강의만 듣는다면 추상적인 개념들이 공중에 뜰 가능성이 크다. 각 장의 제목과 내용을 대략 파악한 상태에서 강의를 들으면 이해도가 훨씬 높아진다.
강의록이 제공되지 않으므로 노트 필기는 필수다. 블랑쇼가 언급하는 작가와 작품, 개념들을 메모하면서 듣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는 말자. 블랑쇼의 세계는 완전한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의 불완전성, 의미의 유예가 그의 사유의 핵심이다.
한 번에 여러 강을 몰아 듣기보다는 하루에 한 강씩, 여유를 두고 듣기를 권한다. 120분이 넘는 긴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강의가 던진 질문들을 곱씹어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듣고 난 뒤 산책을 하거나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블랑쇼의 '바깥'이 어떤 감각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수강후기에서
수강생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바깥의 사유, 에고를 해체하는 비평의 경지를 엿봤다"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너무 어렵다. 번역가만 이해할 수 있을 듯"이라는 솔직한 고백도 있다. 한 수강생은 "완강했지만 머릿속에 남은 건 '어렵다'는 인상뿐"이라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강의를 통해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친구에게 저의 서사를 너무 강요한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는 수강생, "핸드폰 사용 시간을 줄이고 책 읽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는 수강생의 후기가 인상적이다. 블랑쇼의 난해한 철학이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호평을 받은 부분은 각 작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사물화된 정직함'으로 읽어낸 6강, 뒤라스의 '언어의 낭비'를 에고 삭제로 해석한 5강, 라스코 동굴과 바타유의 황홀경을 다룬 2강이 자주 언급된다. 역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는 평이 많다.
아쉬운 점으로는 강의록 부재가 꼽힌다. 난이도 높은 내용을 복습하려면 강의를 다시 들어야 하는데, 한 강이 120분이 넘다 보니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수강생은 "블랑쇼의 독특한 문체를 원문 인용으로 더 느끼게 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 마치며
일상과 소비와 쾌락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이 시대에, 에고의 허상을 거부하며 바깥의 사유를 성찰했던 블랑쇼는 과연 무슨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을 잃을 정도로 많은 것에 중독되지만, 그만큼 에고에 대한 집착도 깊어진다. SNS는 '나'를 끊임없이 노출하고 확인하라고 부추긴다.
블랑쇼는 정반대 방향을 제시한다. 자신을 지우는 것, 무아와 무언어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 상대를 절대적 타자로 존중하는 것. 이것은 현대인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블랑쇼는 우리 시대의 작가다.
이 강의는 쉽지 않은 여정을 제안한다. 친숙한 동일성의 바깥으로, 편안한 이해의 저편으로 향하는 여정. 그곳에서 우리는 낯선 우정의 대화를 듣게 될 것이다. 말 없는 현존, 그것이 바로 블랑쇼가 평생 추구한 문학의 경지다. 류재화 선생의 친절하면서도 깊이 있는 안내를 통해, 그 고독하고도 풍요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류재화(번역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강사)